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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역사적 배경과 존로 이전의 금융상황
17세기 말과 18세기초의 이 기간은 특히나 프랑스 국민들에게는 잔인한 시기였습니다,
아직 루이14세가 통치하던 이 시기의 프랑스는 아우크스부르크 동맹을 시작으로
대영제국, 오스트리아, 홀란드, 스페인전쟁등..1689년부터 73년까지 거의 지속적으로
전쟁을 벌여 왔기 때문입니다.(League of Augsburg / 1686년 루이14세의 침략에 대비,
신성로마황제 레오폴트 1세와 제국령 안의 일부 제후및 연방과의 사이에 체결된 동맹.
1689년 본격적으로 전쟁 시작. 신세계와 카리브까지 확대)
이 전쟁으로 인해 프랑스는 막대한 전쟁비용뿐만 아니라 수많은 국민들의 생명을 왕의
명령이라는 미명아래 희생시켰고, 1693년과 94년에 몰아닥친 기근과 위그노교도들에
대한 박해로 인적 자원및 전문노동력까지 잃어버렸으며, 거기에다 1708년과
1709년에는 유례없는 혹한이 덮쳐 수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가던...그야말로
프랑스는 절대적 암흑의 시절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특히, 에스파니아 왕위 계승 전쟁(The War of the Spanish Succession, 1701-1713)은
주로 햬외영토와 관련된 전쟁이었는데, 유럽전역에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전쟁으로
인해 발생된 전쟁비용은 참가 국가들의 재정에 상당한 부담을 안겨주게 되었습니다.
이 비용은 주로 통화용 지폐billets de monnaie 로 충당 되었습니다. 본래 이 채권은 돈을 재주조 하기 위해 정화
대신 금괴나 은괴 또는 옛날 동전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에게 일종의 지급보증서로써
1701년 처음 발행된 것이었지만, 전쟁을 지나면서 통화 유통수단으로써 사용되어
왔다고 합니다.
무엇보다 그 당시 파리 조폐국은 새로운 동전을 만들고 배포하는데 있어 놀라울
정도로 속도가 느렸기 때문에, 편리성과 속도의 측면을 감안,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을 고려해 볼때 종이 돈으로 대신 발행 할 수 밖에 없었던 처지였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전쟁은 계속되었으며, 통화를 남발하게 했고, 이 때문에 그들의
(채권형태)화폐가치는 곧 절하될 것이라는 예상이 일반적이었음은 자명했습니다.
결국, billets de monnaie는 통화의 가치절하를 막기위해 파리에서 법정화폐로 공식
인정되었습니다. 게다가 1704년 12월 26일 선포된 왕의 포고문에서는 이 어음에 대해
7.5%의 이자를 지불하도록 강제하기까지 합니다.
순전히 정부가 대출을 받기위해 만들어진 이 채권은 여러 왕실기관에서 정해진
규칙없이 마구 발행되었는데, 별도로 관리 되었어야 함에도 이 또한 이미 유통되고
있던 billets de monnaie에 계속 더 해지고 있는 실정이었습니다.
1708년, billets de monnaie의 총 공급은 8억 리브르 트루누아 livre tournois 에
달하게 되었고, 이 어마어마한 부채의 증가는 프랑스정부에게 이자에 대한 압박을
가중시켜, 루이14세가 잠을 못잘 정도의 부담을 만들어 내게 되었다고 합니다.
결국...이러한 금융부담을 줄이기 위해 재정회계감사원장인 Nicolas Desmaretz는 8억
리브르 트루누아를 billets d´etat의 2억5천만 리브르 트루누아로 billets de
monnaie를 전환시켜, 이 새로운 채권에 대한 금리를 4%까지 낮추는 조치를
감행합니다.
그렇지만 골 때리는 것은, 이 두가지 모두 정부가 보증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billets d´etat는 billets de monnaie의 경우처럼 세금으로는 낼 수 없도록 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조항은 이후 이러한 방식의 새로운 종이
어음으로 대체시키는 단초를 제공하게 됩니다.
이 기간동안 프랑스의 노동자 계층들은 billets형태로 발행된 두가지 모두 임금용으로
쓰기엔 명목금액이 너무 크게 발행 되었기 때문에 기존의 경화로 계속해서 거래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점은, 일반 국민들이 정부에서 발행한 종이지폐에 대해 상당히
불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작 정화는 숨겨 놓고 가급적 사용을 자제 했었다는
것입니다...
이에 관해 billets이 법정통화의 지위를 갖고 있었음에도,
"...판매자들은 상품판매시 정화의 시장가치에서만 billets의 가치를 인정했는데,
대개 액면가의 20%에서 50%까지 다양"했었다고 해밀턴은 지적했습니다. 화폐가치의
변동이라는 점에서 보면, 두가지 타입의 billets이 실제 교환수단으로써 인정되지
않았으며, 결국 사람들에게 화폐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만들어 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러한 불신이 화폐를 발행하는 은행의 설립을 방해하게 만든
요인이 되었던 것은 하등 이상할 이유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앞서 벌어진 200년간의 전쟁으로부터 엄청난 전쟁비용이 발생하고 난 뒤, 프랑스
경제는 평화체제로 갑작스럽게 이동하게 됩니다.
이러한 경제적 변화로 디플레이션이 발생하는 것을 막기위해서, Desmaretz는 1713년
12월부터 1715년 9월까지 약 40%의 단계적인 평가절하를 실시할 것이라고 포고합니다.
이 조치가 가격에 미친 영향은 다소 복합적이었는데, 1714년 파리에서의 물가는
낮아진 반면, 보르도, 뚤루쥬, 마르세이유시의 물가는 오히려 올랐지만, 그러나
1715년...프랑스내 모든 도시와 지방의 물가는 결국 폭락하고 말았습니다.
1715년 9월 루이14세는 국민들 1인당 159 리브르(liveres), 약 35억 리브르라는 국가
부채를 남겨 놓고 죽습니다. 루이14세는 그의 생전 엄청난 세금을 부과해놓고
잔인하게 걷어갔음에도 불구, 빚을 갚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의 사망무렵 프랑스는
사실상 파산상태 였으며, 사회, 국가적인 채무재조정을 피할수 없는 상황에 놓여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국가적 혁신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긴축으로 빚을 줄이거나, 일시적인
지불거절로 펀더멘탈을 회복하는데 노력하거나 또는 재협상등을 하는등의 복합적인
시도가 같이 이루어져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 셋중...그 어떤것도 시도되지
않았습니다...
대신 루이14세가 죽고 오를레앙 공작 필립이 권력을 장악, 루이14세의 증손자였던
루이15세가 왕위를 계승했던 1715년부터 1723년까지 섭정으로 프랑스를 지배합니다.
필립공작은 섭정을 시작하자마자 Desmaretz를 회계감사원장으로 임명, 그에게
국가부채를 무조건 줄이라는 임무를 맞깁니다.
Desmaretz는 정부가 진 모든 장기부채를 시 당국들, 특히 이전 글에도 간단히 언급된
파리에 있던 Hotel de Ville를 중개자로 선정, 대대적인 리파이낸싱을 실시합니다.
고정적인 이자 수입을 위해 국가에게 돈을 빌려주었던 투자자들이 지방자치 정부에게
돈을 빌려주록 유도한 것이죠.
형식적으로 세수는 채권자들에게 이자를 지급하기위해 지방자치단체로 배정되었지만,
결국 채권자들은 손해를 입게 되었고, 국가는 이러한 부채전가의 가장 큰 수혜를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프랑스의 변동금리부 채권은 "Visa"라고하는 공채의 파기 또는 말소를 담당하는
기관을 설립, 이곳에 맞겨졌는데, 이것으로 5억9천7백만 리브르였던 유동부채인
일시차입금이 1억9천8백만 리브르로 대폭 줄어 들게 되었습니다.
여러가지 형태로 존재했던 과거의 유동성 부채는 말그대로 그 부채를 최초로 구매한
사람이든, 빚을 전액 현금으로 갚은 사람이든, 채권의 형태는 바뀐 billets d´etat로
교환 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Visa시스템의 총관리를 맡았던 Desmaretz와 필립공작에게 바쳐진 뇌물로
추측컨데, 특정한 사람의 부채를 얼마큼 billets으로 바꿔 줄 것인지가 이 기관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 아니었나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Visa시스템에 의해 강제적으로 금융을 파괴시킨 것도 모자라, 노아유(Noailles)는
1716년 3월 "Chamber of Justice"라는 사법기관을 설립합니다. 머피교수의
설명입니다.
" ...<Chamber of Justice>는 국가에 손해를 끼치는 부당한 방법으로 부를 획득한
것으로 간주되는 부당이득자와 자본가들을 재판하고 처벌하기위해 설립된 임시
기구였다. 이러한 기구의 설립은 새로운 현상이 아니었는데, 1601, 1607, 1625,
1661년등 17세기에만 이미 4번이나 있었던 일이었다. 그들은 두가지 역할을
수행했는데, 피의 숙청과 국가에 세수가 몹시 필요하게 되었을때 어떤 희망을 주는
것이었다.
1716년과 17년 사이 " Chamber of Justice"에 8,000명의 사람들이 조사 되었고, 그중
절반인 4,410명에게 총 2억2천만 리브르의 세금을 거두어 들였다.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들 중 운이없는 사람들은 갤리선(노예선)에 보내지거나, 투옥 혹은 칼에 씌워진채
창고에 가둬지기도 했다. 초기 사법부때와는 달리 처형된 사람은 없었다...."
Visa의 경우처럼 사법위원회가 직접적으로 과세를 강제한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역할은 어떻게 보면 금융소외계층에게 자산가들이 그들의 부담을 떠넘기는 부패가
만연했던 까닭에 그 당위성을 가지고 사회규범이라는 측면에서 합목적적으로 제재를
가 할 수 있었던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자본가 계층에서는 어쨌든 조사와 처벌을 통해 세금을 부과하게 만드는
사법위원회의 행위를 불공정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들 사이에서는 당연히 저항
심리가 팽배해 지게 되었습니다. 더군다나 고작 9,500만 리브르에 불과했던 세금이
화폐절하를 통해 실제로는 2억2천만 리브르로 늘어나게 되었으니 이들이 가진 불만이
어떠했는지는 능히 짐작하고도 남을 것입니다.
부자들을 열받게 만들었던 Visa시스템과 결합된 사법위원회의 과도한 세금 조작은
국가의 금고를 일부분 채워 놓고 부채를 줄이는데 도움을 주기는 했지만 결국 프랑스
경제의 숨통을 막아놓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부자들은 투자나 소비를 할 생각을 하지 않았고, 신용은 경색되었으며, 파산은
증가했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노아유는 사법위원회가 했던짓이 국가적으로 해를
끼치는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었고, 임시기구였던 사법위원회를 1717년 3월, 결국
폐지하고 맙니다.....
b. 존로의 시스템과 버블의 형성과정
존로는 1716년 5월, General Bank에 대해 20년간 독점권을 획득하자마자, 그의 집에서
은행업무에 관련된 일에 착수하기 시작했습니다. 해밀턴이 역사상 한 남자에의해
그렇게까지 철저하게 지배되었던 국영은행은 어디에도 없었을 것이라고 단언했던,
바로 최초의 은행장이자 재무부 장관으로써 한 시대를 풍미한 존로의 역사가 드디어
시작 된 것입니다.
은행장으로써 존로가 자신의 집에서 제일 먼저 한 일은 Banknote를 표준
결재일(Standard date)에 정화로 지불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은행은
세금을 내지 않도록 했고, 전쟁이 일어났을 경우 해외예금자들이 예금한 사유재산이
몰수 되지 않도록 배려하였으며, 그래서 예금자들은 동전이 생기면 이를 뱅크노트와
바꾸어 받아가곤 했습니다.
은행은 고유 계정을 열어놓고 인출을 가능하게 하거나, 일정한 금액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낼 수도 있게 했는데, 이는 현대의 수표를 발행하는것과 유사한
것이었습니다. 교환용 어음이나 편지들은 은행에서 할인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존로 역시 암스테르담의 경우처럼 해상보험등의 기업 비즈니스를 대행하는
무역은 관여하지 않았으며, 은행에서 발행하는 뱅크노트의 양이나 금액에 제한은
없었지만 유통될 뱅크노트(은행권)의 양은 전적으로 존로의 판단에 맡겨졌습니다.
1716년 5월 20일, 드디어 General Bank의 조직이 구체적으로 드러났습니다. 은행의 총
자본은 6백만 리브르였고, 주당 5,000리브르…1,200주를 발행하기로 한 것입니다.
하지만 머피 교수는 이 부분에 대해 한 가지 중요한 점을 지적 하고 있습니다.
“…은행의 유효자본은 자본금 중 25%만을 정화로 지불할것을 약속했으며, 나머지
75%는 정부의 채권형태인 billets d´etat (State note / 대략 만기가 1년 이상인
정부채권)였다는 사실 때문에 (600만 리브르보다)훨씬 적었다. billets d´etat는
표면가치에 약 60%까지 할인 되었고, 그렇기 때문에 지불하기로 된 유효한 자본
금액은,
Specie 1.5 million(600만 x 25%)
Billets d´etat (4.5 x 0.4) 1.8 million(450만 x 0.4(할인율))
ㅡㅡㅡㅡㅡㅡ
3.3 million livres tournois
(livres tournois ; 화폐단위 / 20수(sous) 짜리 주화를 가리키는 말)
즉, General Bank의 유효자본은 기껏해야 총 3백30만 livres tournois에 불과했고,
그마저도 4회에 걸쳐 균등분할 방식으로 납입되었다. 결국 제네럴 뱅크는 1회만
납부된 상태에서 825,000리브르(52,700파운드)로 은행 업무를 시작 한것이다….”
존로가 은행문을 열었을때, 엄청난 금액의 정부부채가 1716년 Visa시스템을 이용하여
정리 되었음에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채 남겨져있는 상태였습니다. 이 부채를 추정해
보면, 연금형태로 남겨진 장기 채권이 약 2억5천만 리브르 트루누아, 또 다른
정부채권인 billets d´etat의 형태로 2억1,500만 리르브 트루누아가 미해결 된 채
남아있었다고 합니다. (그나저나 화폐단위가 뭐 이렇게 길고 복잡한지
모르겠습니다…불어라 그런가…저도 쓰면서 헷갈리네요…ㅡ.ㅡ;;)
이처럼 엄청난 정부 부채와 더불어 은행을 시작하는데 들어와야 할 자본이 부족한
상태에서 오를레앙 공작에게 약속한데로 존로는 이자율을 낮추기 위해 또 다른 수단이
필요하게 되었고, 그래서 그가 선택한 방법은 미시시피 주식회사의 전신인, 바로 The
Company of the West를 설립하는 것이었습니다. 1717년 여름의 일이었습니다.
The Company of the West에 대한 아이디어는 존로가 아니라 프랑스 역사상 최고의
거부이자 금융가였던 Antoine Crozat라는 사람으로부터 나온 것이었는데, Crozat은
당시 Visa 시스템으로 인해 상당한 과세의 의무를 이행해야 했기때문에, 루이지애나에
있는 자신의 소유지에 대한 임차권을 정부에게 주어 그 세금문제를 해결하기를
원했습니다.
존로는 그의 제안으로 미시시피 주식회사에 대한 원대한 구상을 만들수 있었고 1717년
8월, Crozat의 소유하고 있던 기업의 지분을 매각하는것을 받아 들이기로 합니다.
결국 미시시피 버블의 발단은 존로가 은행을 세우기 이전에 시행된 Visa시스템과
Crozat의 꼼수가 그 원인을 제공한 셈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세워진 이 회사의 초기 설립자본은 주당 500 l.t 로 200.000주의 주식을
발행, 총 1억 l.t 로 시작 되었는데, 이 주식들은 국채인 billets d´etat로만 구입할
수 있었고, 이 국채는 그 당시 68%~72%사이에서 할인 되었습니다.
따라서 유효자본은 위의 계산식대로 하면 3,000만 l.t (리브르 트루누와) 내외였으며,
주당 가격도 500 l.t 에 훨씬 못 미치는 150 l.t 에 불과했습니다. 물론 Company of
the West사의 핵심 자산은 프랑스 정부가 승인한 루이지애나의 무역독점권
이었습니다. 이 특권은 저리로 주식을 정부부채와 주고 받은 댓가로 얻은 것입니다.
초기의 General Bank는 존로나 직원들 모두 신중하게 운영 했습니다. 이 당시 은행이
발행한 뱅크노트는 앞서 밝혔듯 정화에 의해 완전히 보증 된것이었 습니다. 때문에
은행업무를 시작한지 첫 31개월 동안, 뱅크노트의 발행으로 인한 프랑스의 화폐공급은
불과 3%증가한것에 그쳤습니다. 은행의 결재에 대한 의무는 모두 순조로웠고, 점차
프랑스 국민들사이에서 존로의 시스템은 상당한 신뢰를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순조로운 출발 덕에 이 당시 존로식 은행업무는 파리 외곽의 지방으로까지 확대하기에
이르릅니다. 존로는 뱅크노트를 정화로 바꾸는것을 승인해 달라는 수취인들의 요구,
즉 은행에 대한 간섭을 허용했으며, 거기에다 파리에서는 은행권(뱅크노트)에 한해서,
세금 면제라는 혜택까지 주었기 때문에 은행권은 강제성을 띠지 않고도 빠르게 확산,
유통될 수 있었습니다.
존로가 위와 같은 정책을 취한 이유는, 필요하다면 국가의 권력을 사용해서라도
은행권의 시장유통을 강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고, 이 은행권들을 사용하는데
이자 부담을 갖지 않아야하며, 또 그 자리에서 지불이 가능한 것이어야 한다는 그의
관점을 반영했기 때문 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사람들이 과거 뱅크노트를 불신했던
이유가 바로 은행권에 부과된 이자 탓 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존로는 특히 이 부분을
상당히 완화할 필요가 있다고 본 것 같습니다.
해서, 1717년 4월 10일, 프랑스 정부는 국가에 내는 모든 세금을 은행권에 명기된
액면가 그대로 납부하도록 선포합니다. 이 날은 General bank를 위해(말 그대로
은행을 위해) 국가가 개입한, 첫번째 사례로 기록된 역사적인 날이었습니다.
문제는 지방정부였습니다. 이미 6개월전에 이에관한 지침을 명령받았지만,
지방정부들은 은행권의 사용을 반대하기 위해 함께 연합하여 공동으로 대응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사법위원회를 관리했던 Noailles공작은 1717년 9월 12일,
1718년 2월 26일과 6월 1일, 3번에 걸쳐 추가적인 법령을 발표하고 힘을 행사, 결국
반대 세력들을 굴복시킵니다. 이러한 정치적 혼란을 2년여동안 거친 후, 1718년 12월
4일, General bank는 비록 이 은행의 공모주 발표가 있기 전날 정부에 의해 주식이
전량 매수되기는 했지만, Royal Bank로의 전환을 공식 발표합니다.
1719년 5월 존로가 세운 The Company of the West의 주가는 고전을 면치 못했고,
명목상 주당 500리브르에 발행된 가치에서 상당히 할인된채 매도되고 있었습니다.
존로는 자신의 은행 시스템을 완전히 가동 시키려면 이 회사의 주가를 급격히 올려
메수세를 지속적으로 끌어들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그의 생각을 바탕으로 한
첫번째 움직임은 동인도 회사와 China Company를 The Company of the West와
합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세워진 이 새로운 회사는 인도회사(Company of the Indies, 즉
미시시피회사)로 사람들에게 알려 졌습니다. 문제는 이 합병이 성공적이
되기위해서는, 기존의 배를 새로이 단장하거나 새 배를 건조하면서 발생된
차이나회사와 동인도회가 지고 있었던 엄청난 부채를 갚아주어야만 한다는
것이었는데, 존로는 여기에 들어갈 필요한 자금을 얻기위해 이 당시 완벽하게 통제
되고있었던 식민지 무역을 적극적으로 활용, 착취하기 시작합니다.
이후, 미시시피 컴패니는 그 해 6월 4일 아프리카 회사(Company of Africa)를
인수하면서 더 많은 자금이 필요하게 되었고, 존로는 주식을 사자마자 50리브르의
프리미엄을 주는 조건으로 주당 500리브르의 미시시피 주식 50,000주를 발행하기로
계획을 세웁니다. 물론 의회는 이렇게 위험한 방식으로 주식을 발행하는것을 승인하지
않았지만, 섭정을 해왔던 그의 지지자들의 조치로 6월 17일 의회령에 의해 추가 주식
발행을 일방적으로 승인해 버립니다.
이 조치로 인해 미시시피 은행의 주가는 650리브르까지 치솟았고, 이후 무려 5섯번에
걸쳐 총 1억5천9백9십만 리브르의 은행권을 발행 합니다.(1719년 1월 1,800만
리브르의 은행권 발행을 시작으로, 2월에는 2천만 리브르, 4월에는 두번에 걸쳐 총
7,190만 리브르, 6월에 5천만 리브르 이상을 추가 발행) 그러나 존로는 그가
원하는데로 주식발행과 은행권을 얼마든지 찍어 낼 수 있게 되었지만...이제 그의
시스템은 서서히 통제될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달아가는 형국으로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어쨌든 그의 의도대로 미시시피 회사의 주식이 활기를 띄자 주가는 상승하기
시작했고, 존로는 새로 발행된 5천만주의 주식을 20개월에 걸쳐 주당 25리브르에
매수하는것을 허용하기로 하므로써 버블이라는 불에 기름을 쏟아 붇기 시작했습니다.
존로는 신주의 발행과 구매를 장려하는 한편, 구주에 대한 관심이 줄어드는 것 또한
원하지 않았기때문에, meres라고 불리는 구주(old shares)를 갖고있는 사람들에
한해서 filles, 즉 요즘 용어로하면 신주의 주주할당발행(right issue)이라고 알려진
신주를 구매할 수 있도록 합니다. 투자자들은 4개의 기존 주식으로 하나의 신규
주식을 살 수 있게 된것입니다.
"....이러한 권리는 1회에 한해서 프리미엄을 주고 팔 수 있었다.(50리브르 +
25리브르) 실제로 7월 27일에 공포된 것을 보면 프리미엄은 50리브르에 불과했고,
이마저도 9월 1일까지 연기된것으로 보인다. 초기주식인 meres에 대한 관심을
유지시키기 위해 사용된 이런 방법은, 그 때문에 섭정자인 메농뜨 부인과 필립공작,
그리고 그의 동료들에게 상당한 자본상의 수익을 안겨주었던 것 처럼 이 주식을
소유한 주주들에게 굉장한 수익을 보장해 주었다.
하지만 이는 매달(20개월) 분할 납부를 통한 filles(신규 주식)을 구매하여 시장에
들어오려는 다른 사람들에게 주식을 싸게 살 수 있는 기회 역시 주게 되었고, 옛날
주식을 가지고 있던 당시의 주주들은 갖고 있던 구주의 일부를 팔아 신규주식의
매수비용을 지불하므로써 일부라도 자본수익을 실현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존로가 중요하게 생각했던것은 불입식 주식의 발행을 통해 초기 투자금액
대비 두배이상의 자본 수익을 만들어주기 위한 레버리지를 제공했다는 점이었다.
예를 들면, 주식이 1,000리브르로 오르고 이 주식의 일부를 가지고 있던 주주들이
신규주식을 구입하는 비용을 지불했을 경우, 이때 단지 50리브르의 프리미엄만을
지불했다고 가정해보면, 그들이 가지고있던 신주를 매도하여 발생되는 수익은
(1,000-50+(25x20) = (주가상승분 ? 실제 지불된 프리미엄 + (본래 지불했어야 할
추가프리미엄 25르브르 x 분할 납부하기로 한 개월 수(20개월)의 계산식으로 총
450리브르를 얻게 된다. 50리브르의 프리미엄만을 지불, 무려 9배의 수익을 거두는
셈이다….”
머피교수의 지적처럼 화폐공급의 팽창과 맞물린 이 같은 새로운 전략적 마케팅은
인도주식회사의 주식에 투자자들이 관심을 배가시키는데 도움을 주었고 예정된 수순에
따라 그해 7월 중순, 주가는 실제로 1,000리브르를 넘어서게 됩니다.
1719년 7월 20일, 드디어 존로의 인도주식회사(The Company of the Indies)는 9년
동안 화폐를 발행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 받습니다. 이 권리를 획득하기 위한 대가는
5천만 리브르를 15개월 동안에 걸쳐 왕에게 지불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권리를 획득한
그 주에 로얄뱅크는 인도회사가 2억4천만 리브르의 은행권을 발행하는 것을 허락했고,
7월25일, 이 회사는 실제로 액면가 220,660,000리브르의 은행권을 발행 합니다.
인도주식회사의 주가를 올리기 위해 존로는 1720년 일년에 두번 12%(60리브르)의
배당금을 지불하겠다고 선언합니다. 배당에 대한 선언이 있은뒤 바로 그 다음날,
존로는 화폐발행의 권리 획득 비용을 지불하는데 필요한 5천만 리브르의 신주발행권에
박차를 가할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립니다. 머피교수의 간결한 설명입니다.
“…존로는 믿을 수 없을만치 빠르게 움직였다. 그는 화폐공급을 증가시켰고, 때문에
주식시장의 투기라는 바퀴에 기름을 칠해 주었다. 그는 자신의 회사 주식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 당기기 위해 극단적으로 높은 배당을 약속해 버렸으며, 시장을
향해서는 더욱 더 많은 주식을 집어넣고 있었다…”
일을 여기까지 진행 시킨뒤 존로는 이번에는 500리브르의 프리미엄 수익을 얻어내기
위한 다음 단계로 주당 1,000리브르로 주가를 책정합니다. petites filles
(작은소녀)라고 불리는 신규로 발행된 이 주식을 사기위해서는, 구매자들이 4
meres(구주식) 와 1 fille(신규주식)을 가지고 있어야만 했습니다.
petites filles는 매월 50리브르씩 20개월 동안 분할 납부하도록 되어 있었고, 존로는
사람들에게 절박감을 만들어내기 위해, 투자자들이 신주권에 대한 신청을 할 수 있는
기간을 20일로 못박아 놓습니다. 주가가 1,000리브르를 넘도록 하기 위해 투기에 불을
지핀 이 같은 방침은, 실상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한 것이었습니다. 이미 정상적인
단계를 넘어 버블로 치닫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머피교수는 1719년 7월 말부터 8월
초까지 3주동안에 걸쳐 미시시피 주식회사의 주식을 4곳의 출처를 인용하여 간략히
정리 해 놓았습니다.
7월 25일 1,300리브르
Piossens의 “Memoires de la regence de S.A.R. le Duc d´Orleans Durant la
minorite de Louis XV roide France (1729),
7월 29일 1,500리브르
Piossens의 “Memoires de la regence de S.A.R. le Duc d´Orleans Durant la
minorite de Louis XV roide France (1729),
8월 11일 2,250리브르
Dutot의 Dutot, Reflextions politiques sur les finances et le commerce (1738)
8월 9일 2,330리브르
Giraudeau의 Bibliotheque de l´Arsenal (Paris)
8월 4일 2,940리브르
Giraudeau의 Bibliotheque de l´Arsenal (Paris)
(*날짜에 맞춘 것이 아닌 주가의 변동에 맞춘것입니다. 날짜 아래는 출처입니다…)
주가의 상승은 계속 되었고, 9월에는 5,000리브르에 도달하게 됩니다. 주식을
구입하려는 사람들의 관심은 절정에 이르렀고, 존로는 여기서 다시 한번 정부 부채의
리파이낸싱을 시도하기 위해 정책을 바꿉니다. 존로가 3퍼센트의 이율로 왕에게 12억
리브르를 대출, 이것으로 미시시피 주식을 살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려 다시 한번
미시시피 주식을 띄운 것입니다. 이 새로운 정책의 목적은 프랑스에서 발행한 모든
장기공채를 정리하기 위한 것으로 그때까지 남아있던 국채(billets d´etat)를
매각하고자 함 이었습니다.
존로는 1719년 가을 4번, 총 324,00주의 주식을 발행 (9월말 두번에 걸쳐 200,00만주,
10월 둘째주와 4째주에 합쳐 124,000주)합니다. 이 때의 주가는 5,000리브르였고,
10개월간 500리브르를 분납하도록 했습니다. 이 새로운 주식은 “cinq-cents”라고
알려졌습니다
새로 발행된 이 주식의 총액은 15억 리브르가 넘었는데, 이는 존로가 기존에 주식을
발행한 뒤 총 3번에 걸쳐 늘려왔던 것을 모두 합친 것 보다 훨씬 더 많은, 무려
14배에 달하는 금액이었습니다. 쇠는 달궈졌을 때 치라는 말을 넘어선 과도한
조치였습니다.
그러나, 표면상 나타난 수치에 비해, 실제 이 금액의 증가분은 미미했습니다.
cinq-cents를 구입한 투자자들이 이 권리를 획득하는데는 단 500리브르만 지불하면
되었고 나머지는 9개월동안 나눠 내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만일 투자자들이 월 불입금에 문제가 생길 경우 존로가 이를 다시 분기납으로
조정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monthly payments -> quarterly payments)
존로는 어떻게 해야 일반대중들이 미시시피의 주식을 사기위해 시장에 들어오게 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알고 개발해 내었던 진정한 금융개발자이자 그 시대의
선구자였습니다. 소액의 계약금인 첫 할부금만을 내는 독창적인 방법을 설계했을 뿐
아니라, 1720년 “Promes”라는 주식거래용 전문 옵션시장을 새로이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로얄뱅크는 주식구매용 대출을 저리로 받아갈 수 있도록 해 주었는데, 이들이 사들인
주식은 모두 무기명채권으로 만들어진 것이었기 때문에 익명의 제 3자에게 소유권을
쉽게 양도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형태의 채권은 현대적인 의미에서도 중요했지만,
1716년 VisaTax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도 역시 굉장히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이제
얼마든지 합법적으로 재산을 은닉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시장을 이끄는 근본적인 원동력은 역시 로얄뱅크를 통해 새로운 은행권을
끊임없이 계속 발행, 공급하는 것이었습니다. 1719년 말, 은행권의 총액은 10억
리브르까지 증가합니다. 그러나 이는 로얄뱅크를 이용한 실패 직전에 있던 그의
이론의 수명을 힘겹게 계속 연장시키고 있었다는 것 외에 이론적 의미란 사실상
없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런식으로 1720년 5월…은행권은 마침내 총 21억 리브르까지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1719년 말 무렵, 미시시피 주식회사의 주가는 10,000리브르까지 올랐고, 적지않은
투자자들이 주식을 매도, 정화로 이익을 실현하기를 원했습니다. 당시, 섭정자들은
이익의 실현을 원하는 이들의 욕구를 강제하기 위해 여러가지 종류의 포고령을 내리고
그 법령을 강력하게 실행하기 시작합니다.
12월 9일, 미시시피 주식회사는 귀금속의 분리와 제련에 대한 독점권을 승인,
12월 21일, 은행권은 은화당 5%의 프리미엄으로 고정,
거기다 은화는 10리브르 이하의 결재에 대해서만 이용할 수 있게 만들었으며,
금화는 300리브르 이하에서만 사용할 수 있게 합니다.
그것도 모자라 모든 해외 서신의 교환에 들어가는 비용은 오직 은행권만으로 사용할
수 있게 했습니다.
결국 존로는 정화의 유통을 막지 않을 경우,
이 돈들이 해외로 몰래 빠져 나갈것이라는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겁니다....
1719년 12월 30일, 미시시피 주식회사는 1720년 배당금의 비율을 500리브르 가치당
40%로 정해 놓습니다. 이 회사의 시장가가 10,000리브르였음을 볼 때, 구주는 2%,
신주인 “cinq-cents”는 4%대의 수익을 배당금으로 책정해 놓은 것이라고 합니다.
문제는 이 회사의 수입이 현재의 수입만으로는 배당금을 전혀 지불할 수 없었다는
것에 있었습니다. 수익자체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같은 호언장담은 합법적이며 논리적인 관점이 아니라, 여전히 주가를
올리기 위한 수단이자, 과대선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때까지도 이 배당금은 장기공채 보유자들의 수익중 절반만이 프랑스 정부로부터
나온것이었고, 이전에는 미시시피 회사의 주식에 대한 채권을 포기하도록 강요
받았었습니다.
실제로, 공채보유자들은 자신들의 권리에 대한 상환을 강하게 주장했습니다.
그렇지만, 존로는 1720년 회계감사원장의 명의를 사용하여, 장기공채는 7월 1일
배당율을 2%로 일방적으로 전환하므로써 기존 미시시피 회사의 채권 수익율을
인정하지도, 상환하지도 않을 것 이라는 최후통첩을 발표합니다.
이러한 조치로 주가는 점차 떨어지기 시작했고, 이에 존로는 필요하다면 국가의
권력을 사용해서라도 현 시스템을 유지시키기로 결정합니다. 이러한 그의 의지에
따라, 1719년 말, 프랑스는 금화와 은화를 강제 징수하기 시작했고, 1720년 1월에는
각 가정에 정화를 숨겨놓았는지 여부를 수색할 수 있는 권한에 대한 법을 통과
시키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8일 후…프랑스 정부는 은행권을 프랑스의 통화로 공식 선포합니다. 이미
모든 건물을 수색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 받게 된 미시시피 주식회사는 밀고자에게
포상을 내리는 악수를 둡니다. 이후 벌어질 공포정치의 전조였습니다. “루이14세와
15세 시대의 비밀 회고록Memoires Secrets sur les Regnes de Louis XIV. et de Louis
XV”의 저자인 David는 이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흥분시키고 이를 조장하여, 밀고자들에게 포상을 내렸다. 이 시종들은
정화를 보유한 사람들을 그들의 주인들에게 밀고했다. 시민들은 자기들끼리 서로
감시했다. 이것은 Loard Stair가 만든것인데, 그는 존로가 조사실을 만든 이후 그의
종교적 포용성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종이화폐로 바뀌어지고 난후
이미 그의 종교적 교리는 변질되었음이 이로써 증명된 것이다….”
c. 버블붕괴와 존로의 몰락
...1월달 발표된 포고령에 의해 정화를 숨겨놓는 사람들이 사라질 때 까지 존로는
조사와 수색, 그리고 처벌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에 시민들의 공포는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곧 이어 2월 4일에는 3월 1일 이후, 어떠한 형태의 귀금속도 착용을 금지하도록 하는
법을 발표, 존로는 이를 어겼을시 해당 보석을 몰수하는 것은 물론이고
10,000리브르라는 무거운 벌금까지 물리도록 강제 했습니다.
다시 이틀 뒤인 2월 6일, 로얄뱅크는 미시시피가 2억 리브르의 은행권을 발행하는
것을 허용했고, 9일에는 의회에서 심의조차 구하지 않은 채 은행권의 발행을 포함한
모든 법적 절차를 강행 시켜 버렸습니다.
이어서 11일에는 개인간의 모든 선물거래를 금지했고, “선물future”을 매도할 수
있는 모든 배타적 권리를 미시시피주식회사로 귀속시킵니다.
2월 18일, 금세공업자(Goldsmith)들에게는 정부에서 특별히 정한 항목을 제외하고는
금,은의 그릇을 팔거나 제조하는 것을 금지, 다음날인 2월 19일, 금세공업자들이나
귀금속업자들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어떠한 형태의 금이나 은을 소유할 수 없으며,
개인이 소유하고 있는 정화 역시 500리브르를 넘지 못하도록 포고 합니다. 또한
100리브르 이상 되는 모든 상환금액은 은행권으로 지불하고, 정부의 모든 채권자들은
즉시 밀린 납부액을 내도록 명령했습니다.
이런 물밑 작업을 모두 끝내고 난 뒤, 2월 22일 로얄뱅크가 인도주식회사로 합병
됩니다. 이를 시작으로 존로는 그의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은행권을
찍어내기 시작했습니다. 허나 무한정 돈을 찍어낸다는 것은 인쇄업자나 은행원
모두에게 벅찬 일이었습니다. 결국 존로는 돈을 찍어내는 것은 일부 포기하고, 대신
은행권에 들어갈 도안을 새로 디자인하도록 합니다.
하지만 10리브르 은행권의 경우, 서명(혹은 번호)이 안된 채 발행된 것이 너무
많았습니다. 절차를 소홀히 한채 방만하게 발행된 은행권은 사람들의 불신을 초래하게
만들었고, 사람들 사이에서 정화로 돌아가려는 보수적인 분위기가 나타나게 되자 이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존로는 주주회의에서 의결된 경우를 제외하고는 더 이상
은행권을 찍지 않겠다고 선언합니다.
그러나 위에 적었다시피, 바로 이 회의에서 로얄뱅크를 미시시피(인도)주식회사와
합병한다는 충격적인 발표를 했는데, 이는 존로의 이상을 실현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수단들인 주식과 종이 지폐가 하나로 합쳐지게 되었다는것을 의미하는,
전무후무한 역사적인 사건의 탄생 이었습니다. 결국 이런 발언은 지극히
형식적이었다는 것이 드러나기까지 그리 긴 시간이 필요치는 않았습니다. 이 발표가
있기 전, 루이15세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미시시피주식 1000,000만주를 존로에게
양도했고, 그 대신에 루이15세는 로얄뱅크에서 300,000리브르의 신용을,
미시시피로부터는 10년동안 매달 500만 리브르를 받기로 합의 합니다.
총 보상금은 주당 9,000리브르, 무려 9억리브르에 달하는 거액이었습니다.
…………
그 당시 주주회의에서 존로는 합병과 은행권의 추가 발행을 철회하면서, 주식의
매수및 매도를 담당했던 사무실을 폐쇄한다는 발표를 같이 합니다. 임의로
폐쇄할때까지 이 사무소의 원래 역할은 미시시피 주식이 높은 가격을 형성하도록
조절하는 매우 중요한 일을 담당하던 곳이었습니다. 이 사무소의 목적을 머피교수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표면상 이러한 조치들은, 주식거래가 빈번하게 일어났던 켕캉프와 거리rue
Quincampoix(현재의 월스트리트 정도라고 생각하시면 될 듯합니다...)에 있던 일부
악덕 고리대금업자들의 사기 행위들을 방지하고자 했던 시장의 요구를 받아 들인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주가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을 막으려고 (정부, 즉
존로가)공식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설립된 것이었다. 이 정책으로 인해 존로는
미시시피주식을 화폐화 할 수 있었고, 시장의 유동성을 어마어마하게 팽창시킬수가
있었다…”
문제는 이러한 조치들이 급격하게 화폐생산과 엮이면서 미시시피의 주가를 하락
시키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이 발표들이 있던 그 주에, 미시시피 주가는
9,545리브르에서 7,825리브르로 무려 26%가 폭락합니다. 결국 존로는 주식과 은행권이
정화로 이동하리라는 것을 미리 예상하여 2월초 귀금속 소지등을 금지한 포고령으로
이 문제를 사전에 예방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를 반증하듯 2월 25일 존로는
루이도르화(louis d’or / 대혁명 때까지 통용된 프랑스의 금화)를 25리브르에서
30리브르로 올리고 다른 동전들도 비율을 맞춰 올린다는 발표를 합니다. 머피교수의
글입니다.
"...이 발표는 정화의 양적 축소가 임박했다는 것을 시장에 알려주는 신호였다. 정화
보유자들에게 보낸 이 메세지는 정화를 벗어나 은행권이 정화로 대치될 것이라는
분명한 신호였다. 즉, 화폐량을 감소시켜 정화의 가치를 떨어뜨리겠다는
발표였다...."
이틀 후 존로는 개인이 500리브르 이상되는 정화의 소유를 금지한다고 거듭
발표합니다. 따라서 은행이 500리브르 이상되는 정화를 은행권으로 바꿔주는것을
거부할 수 있게 되었는데, 다시 말하면 합법적인 교환 거부, 즉 지불거절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로써 존로는 사람들에게 부를 축적하는 방법으로
두가지의 선택권만을 주게 되었습니다. 주식과 은행권이었습니다.
…………
3월 5일, 존로는 몇 가지 정책을 추가로 더 발표합니다. 우선, 주가를 다시 올려
놓아야 했기 때문에 주식을 거래했던 사무실을 다시 열기로 한 것입니다. 이 사무실은
현재 bureau de conversions라고 알려져 있는데, 당시 9,000리브르의 가격으로 무조건
보증, 미시시피 주식을 사들이고 있었던 곳이었습니다. 존로는 이 조치로 미시시피
주식을 다시 한번 화폐화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됩니다. Davis는 이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고정가격으로 주식을 사들이게 되면서, 주식은 즉시 유통수단의 일부가 되었다.
프랑스 전체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파리에서는 그랬다. 하지만 여기에는 세금이 부과
되지 않았으며, 또 법정통화로 인정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 주식은 고정가격으로
은행권과 바꿀 수 있었으며, 이로써 그들의 목적을 충분히 달성할 수 있게 되었다.
Charles Dutot는 이 포고령의 한 문구에 주의를 기울였다. 그는 주식이 '...돈으로
사용될 조건들을 충족시키게 되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정책은 정화의 교환비율을 늘리겠다고 발표한 것입니다. 루이도르화(louis
d’or)는 다시 한 번 36리브르에서 48리브르가 되었고, 프랑스 은화인 ecu는 6에서
8리브르로 교환비율이 올라갔습니다. 이 같은 교환비율의 증가는 은행권 대비 정화의
감소가 임박했음을 암시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조치가 취해진 이유중 하나는 은행대출의 만기가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이를 두고 Davis는"..때문에 이 명령은 절대적이었고, 은행은
대출로 이익을 얻는것 외에 다른 영업은 없었다는것을 의미했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 주인 3월 11일, 존로는 정화의 양을 줄이겠다는 발표를 합니다. 정화의 양을
줄이겠다는 것은 곧 정화가 갖고 있던 통용화폐로써의 자격을 박탈하겠다는 의도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5월 1일, 금은 화폐로써의 자격을 아예 폐지해 버렸으며,
이후 1720년 12월에 은 marc화의 교환비율 역시 월평균 80리브르에서 30리브르까지
단계적으로 줄이며 거의 폐지하다시피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존로가 의도한
바였다는 것은 말할 것 도 없고, 결국 프랑스에서 유통되는 교환수단을 은행권과
미시시피 주식, 두 가지밖에는 남겨두지 않게 되었던 것이며, 이 둘 모두 존로의
강력한 통제하에 놓여진 채 완벽하게 관리 될 수 있었습니다.
………….
1720년 3월 5일의 포고령에대한 시각은 관련 글의 저자들마다 상당히 다릅니다.
참고로 Davis는 이러한 현상에 대해 이렇게 요약했습니다.
"Daire에 따르면, 이 시스템의 핵심원리는 존로의 경제적 이상을 완전히 실현했다는
점에 있다. 은행이 유통수단들의 보관소가 되었다는 것, 그것은 은행이 공급자이자
판매자의 역할을 하게 되므로써 인도주식회사의 주식이 아무리 높아지더라도 그
가격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사람들은 여유자금이 많아지면서 이를
주식으로 바꾸기 위해 은행에 가는 방법을 찾아냈다. 이는 주식이 1년미만의 채권으로
전환된다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Duoto는 이 포고령 때문에 그때까지 유지되고 있던 시스템에 치명타를 입게 된
것 이라고 말한다. 존로는 채권과 주식 둘 다 유지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
비교해보았지만, 그 역시 둘 모두를 보호할 수는 없었다. 그 당시 주식은 채권가격
대비 4배이상의 가치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존로는 주식을 선택했다. 이
조치가 취해진 것 으로 유추하건데Duoto는 이 실수가 만들어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존로는 국채를 신뢰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Duoto의 경우 존로는 투기에 대해서 책임이 없다고 생각했으며, 오히려
섭정자들이 그 포고령에 책임을 져야함을 암시했다. 그리고 그는 이것이 시스템을
망치려는 적들에 의해 계획된 것이라고 말한다. Forbonnais (Francois Veron Duverger
de Forbonnais (1722?1800))의 경우는 그 포고령이 시스템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결정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러한 조치가 자사주로 흡수하여 약속된 배당금을
지속적으로 받아내려는 목적이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배당금은
지불되지 말아야 했었고, 존로는 재산을 몇 배로 불려주기로 한 약속에 집착하고
있었던 까닭에, 그래서 주식을 유통되고 있던 화폐자산의 일부로써 간주하는 편법을
썼었던 것이라고 믿었다.
또 한사람, 프랑스 2월 혁명 당시 사회주의 세력의 지도중 하나였던 루이블랑(Louis
Blanc)은 그 포고령은 범죄나 다름없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그는 이 불법적인 조치의
모든 책임을 존로에게 돌렸다. 그 포고령으로 인해 일부 군주들이 몰락하게 되어
주식은 더 이상 매매가 될 수 없었다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3월 5일의 포고령이 끝은 아니었습니다. 5월 21, 또 한번의 포고령이 발표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래의 표는 5월21일 발표된 네번째 포고령에서 은행권과 주가의
감소부분을 구체적으로 정리한 머피교수의 저서 "종말의 시작Beginning of the
End"이라는 글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이 포고령에 의해, 존로는 그가 계획했던 3월5일의 발표가 주가를 9,000리브르로
보증함과 동시에 은화의 가치를 단계적으로 감소시키며, 유통을 지속할 수 없도록
법적으로 합의할 의도였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었습니다. 머피교수는 Richard
Cantillon이라는 또 다른 그의 저서중 156페이지에 이를 각주를 붙여 설명해
놓았습니다.
“…존로는 은화의 교환비율이 80에서 30으로 줄어들었기 때문에 갖고 있던 주식이나
은행권 역시 떨어질 것 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가
주장했던 시스템에 대한 언급을 소급 적용해 보면 그는 은화가 줄어들길 원했었지만,
기득권들에 의해 그렇게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 언급은 정치적으로 내부자들의 이익을 위해 시스템이 희생되었다는 Louis Blanc의
분석으로 그 신빙성이 더욱 확실해졌습니다.
“…그것은(은화의 교환비율) 은행 어음과 정화간의 비율을 정하기위해 필요한
것이었는데, 그러므로 그것이 없어지고 난 뒤, 우리는 이전 비율에서 이탈하도록
압박을 받았고, 결국 은행의 업무와 어음은 그 신뢰를 잃어버리는 상황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
존로가 시장을 자극하거나 가혹할 정도의 강제적인 힘을 사용하여 유통되지 못하게
정화를 퇴출시키려던 바램만큼 프랑스 국민들은 종이화폐가 금이나 은보다 훨씬 더
좋다라는 존로의 관점에 완벽하게 설득당하지 않았습니다. 1720년 3월의 포고령은
로얄뱅크로 정화를 끌어들이데 어느정도는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확인된 자료에 따르면, 일반인들이 가지고 있던 은행권은 21억 리브르였고,
은행에서 새로 발행했거나 가지고 있던 기존의 은행권은 6억 리브르에 달한 반면,
이를 바꿔줘야 할 로얄 은행의 정화 보유액은 은화 2,100만 리브르와 금화 2,800만
리브르에 불과했었다고 합니다. 존로로써는 정화야말로 당장이라도 없어져야 할 악의
근원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존로는 21일 결국 되돌릴 수 없는 이상한 조치를 단행합니다. 주식의 가격을 정화의
교환비율과 비슷한 수준으로 갑자기 폭락시켜 버린 것입니다. 대중들의 미친듯한
울부짖음 때문에 존로의 친구들과 섭정자는 존로를 좌천시키고 자택에 연금 시킵니다.
금융시스템을 건설하면서 존로는 처음에는 존경을 받았지만, 이제는 비난을 받는
처지로 전락했고, 거기다 5월27일 섭정자였던 오를레앙 공작은 5월 21일 존로가
발표한 포고령을 철회 하므로써 사회전반에 걸쳐 나타나고 있던 혁명적 분위기를
막기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습니다.
그래서 이틀 후, 오를레앙 공작은 금과 은의 소유를 금지했던 법까지 무효화함에 따라
정화의 양이나 교환비율을 현재보다 늘리겠다는 약속을 담은 발표를 하기에
이르릅니다.
하지만 존로가 세워 놓은 금융시스템은 이제 유혈이 낭자한 현장이 되었음에도, 그는
정부 내 조금 낮은 자리인 통상무역장관Intendant General du Commerce에 다시 임명,
그가 여전히 로얄뱅크의 은행장임을 재확인 시켜주었습니다.
1720년 말, 존로는 불안정해진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그 어느때보다도 많은 애를
썼지만, 일반 대중은 존로의 짜증나고 야단스러운 금융정책에 더 이상 빠져들지
않았습니다. 머피교수가 정리한 아래의 표는 1720년 6월부터 11월까지 미시시피
주식회사의 주가 하락추세가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특히 주목할 것은, 이 표를 보면 비록 주가가 하락했다고는 하나 단계적으로 그렇게
된 것 이었고, 이는 일반적으로 자산가격이 급격하게 붕괴되는 여타의 다른 버블과는
그 양상이 다르게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머피교수의 설명입니다.
“…그러나, 미시시피의 주가가 단계적으로 붕괴된 것 에 대해 설명하자면, 그 현상이
주가의 하락이 가파르고 느닷없이 일어났던 남해주식회사의 사기와 비슷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프랑스에 있던 상당한 양의 정화는 유통 과정에서 이미 사라진
것이고, 그 사라진 정화는 존로의 다양한 수단들을 통해 그의 의도를 일찌감치 눈치챈
똑똑한 대중들이 축적해 놓았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었다.
프랑스에서 부를 소유한 사람들의 대부분은 전통적인 케인즈식의 두 종류의 자산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하나는 화폐(은행권)였고 다른 하나는 채권(미시시피
주식회사의 주식)이었다. 주가는 프랑스의 투자자들이 주식이든 은행권이든 손실을
입지 않으려는 의지가 분명했기 때문에 마지막까지도 떨어지기가 쉽지 않았다. 때로는
은행권을 보유하는 것 보다 주식에 대한 믿음이 더욱 강해진 탓에 오히려 오르기 까지
했다….”
존로에 의해 발행된 초과 통화의 영향을 정확하게 계량하는 방법은 그 당시 프랑스의
환율을 보는 것이라고 합니다. 머피교수의 연구에 의하면1720년 4/4분기를 제외한
상태에서 리브르화는 5월 파운드화로 20펜스의 가치를 지녔던 것이 9월6펜스까지
떨어졌다고 합니다
무엇보다 리브르화가 파운드화 대비 폭락하기 시작한 것은 미시시피 버블이
폭발하려는 징후가 보였던 시기와 정확히 일치하고 있습니다. 아래는 이를 비교한
표입니다.
………………
이제 가장 중요한 호황과 거품의 붕괴가 존로에 의해 연출되는 동안 프랑스
노동자계급의 삶에는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서 접근해 볼 차례입니다.
화폐공급의 팽창이라는 통화조작을 만들어내는 모든 현대 정부의 경우처럼, 이렇게
풀린 돈은 민중전체로 고르게 퍼진 것이 아니라, 돈에 접근이 쉬운 어떤 그룹, 즉
정부, (신용이 좋은)대출자, 투기꾼들에게 그 혜택이 간 반면, 다른 그룹, 노동자
계급이나 노인들, 또는 저축자들의 경우는 예외가 되었습니다.
Hamilton은 그가 쓴 "존로의 시스템하에서의 파리의 임금과 물가Prices And Wages At
Paris Under John Law’s System"라는 책에서 당시 파리의 상품가격, 명목 임금및
실질임금을 나타내는 지수를 만들었습니다. (이 상품가격지수는 식료품, 원자재,
도매건축자재와 생활 필수품으로 구성) 그렇지만, 케인즈가 정의한 단기적으로 가격이
움직이지 않는 빵이나 소금같은 비신축적가격이 빠져 있었으며, 또
명목임금지수에서는 일반 정규직 봉급자들을 제외한 상태에서 기술자나 일반
노동자들의 일당만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이를 보건데 해밀턴이 의도한 것은 당시의 지수를 이용하여 존로나 당국이 미시시피
버블기간 동안 임금이나 물가의 상승을 간과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점을
증명하려는데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나 싶은 생각이 듭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상품가격, 명목임금, 실질임금을 비교한 아래의 표는 인플레외에도
많은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위에서 택한 날짜들은 그저 무작위로 뽑은 것은 아니라, 각각의 날짜들이
나름대로 상당한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May 1716 -> General Bank에 대한 특허 취득
Dec. 1718 -> General Bank에서 Royal Bank로 변경
July 1719 -> Royal Bank에서 2억2,100만 리브르의 은행권
발행
Jan. 1720 -> 미시시피 주식의 가격이 10,000리브르로 최고치
경신
Mar. 1720 -> 존로의 포고령으로 은화의 양및 교환비율 축소
May 1720 -> 은행권과 주식 감소
Sep. 1720 -> 정점에 달한 파리 물가지수
Dec. 1720 -> 존로의 시스템 붕괴
위의 표는 보다시피 물가와 임금간의 상당한 불균형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시스템이
만들어지고 난 뒤, 물가는 정신없이 치솟았으며, 임금은 비록 가끔식 오르기는
했지만, 물가 상승의 속도를 따라 잡은적은 결코 없었습니다. 위의 물가지수는
건축자재를 포함한 것인데, 1720년대 해밀턴이 만든 지수에 포함된 어떤 상품보다
가장 큰 퍼센테이지로 올랐음을 알 수 있습니다.
현 시대에서도 수없이 벌어지고 있는 경우처럼 화폐의 공급은 늘어나고 있었고,
파리에서의 건축업은 미친듯한 속도로 증가했으며, 따라서 건축자재 원가 자체는
두배나 뛰어오르게 되었습니다. 버블이 터지고 난 그 다음해, 이 분야에서의 수익은
지난 3분기 동안 벌어들인 것을 모조리 날려버리고 말았습니다….
마치 2010년의 대한민국처럼.....
물론 이러한 호황과 침체가 파리에서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해밀턴은 미시시피
버블 기간 동안 프랑스 남부의 세도시(Marseille, Toulouse, and Bordeaux)에서
임금과 물가지수들을 수집, 정리했습니다. 해밀턴의 요약입니다.
"....1720년 6월에서 10월까지의 물가는 보르도에서 36%, 뚤루쥬에서 47.2%,
마르세이유에서 12.3%가 증가했다. 물가는10월달에 가장 높이 상승했는데, 1716-1717
평균 보르도에서는 두배, 뚤루쥬에서는 2.4배까지 각각 올랐다. 1720년 봄이 끝날
무렵부터 여름까지 프로방스 지방을 초토화시킨 비극적인 역병(페스트)때문에,
마르세이유에서는 그해 9월 가장 높은2.7배까지 물가가 치솟아 올랐다. 이곳에서의
물가가 정점을 찍었을 무렵인 1716-1717년 사이 파리의 물가는 2.04배 증가하는것에
그쳤다.(상대적으로)…”
불행히도 임금에 관해서는 브르도에서 발견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해밀턴은
뚤루쥬에서는 4분위로 나누어진 노동자 등급, 그리고 마르세이유에서는 7단계로
구분된 노동자 계급들에 대해 묘사한 금융기록을 확보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 1711년부터 1718년까지 이 곳에서의 임금율은 변동성이 심하지 않고
안정적이었다. 1719년 존로가 그의 시스템을 열심히 구체화하기 시작하면서, 임금은
2/4분기에 가파르게 상승했지만, 여전히 물가를 따라가지 못하고 상대적으로 정체되어
있었다. 그의 시스템이 붕괴된1720년 4/4분기에 뚤루쥬에서의 실질 임금은 (100을
기준으로 놓았을때) 82.2, 마르세이유에서는 87.8이었다. 파리에서도 같은 현상을
나타내고 있었다. 임금의 증가는 늘 물가 상승을 따라가지 못했다. 이 시스템의
여파로, 임금소득자들은 뚤루쥬에서 1/10이 사라져버렸고, 실질 임금지수는 1721년
3/4분기에 76.3으로 곤두박질 쳤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이 마르세이유에서는 발생하지
않았는데, 역병으로 인구의 1/10이 줄어들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마르세이유에서는
노동자들이 부족해지는 현상이 일어났다. 실질임금은 1721년을 시작으로 상승,
1725년까지 계속 되었다...."
존로의 시스템으로 인해 파리에 살고 있든 아니면 프로방스에 살고있던…프랑스의
노동자 계급들에게는 재앙적인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존로를 두둔하려했던 해밀턴조차 “존로의 시스템은 노동자 계급들에게는 비참한
것”이었다고 인정했으니까요....
...............
지금까지 존로의 미시시피 시스템을 서술한 내용에서 보듯, 존로는 그가 살았던
시대를 상당히 앞질러갔던 인물이었음은 분명합니다.
그는 은행을 만들었고 거기서 여러가지 방법으로 현대적인 은행의 원형을 생각해 낼
수 있었습니다.
로얄뱅크라는 수단을 통해, 존로는 무에서 돈을 만들어내었고 은화나 금화에 꽉
붙잡혀 있는 금융에서 벗어나려고
그 당시로써는 의미없는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습니다.
그의 투쟁은 그후 인플레이션의 구조를 받아들인 Benjamin Strong과 Montagu
Norman에서
20세기 Alan Greenspan과 21세기의 벤 버넹키까지 이르르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존로 스스로가 밝힌 그의 시스템을 전체적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풍부해진 돈은 이자율을 2%까지 낮출 수 있을 것이며, 공공기관들의 부채에 대한
금융비용을 낮춰 왕을 살려 낼 수 있게 될 것이다. 그것은 토지를 소유하고있는
귀족들에게 진 빚의 부담을 덜어주게 될 것이다. 후자의 그룹은 농산물을 높은 가격에
팔게되어 부자가 될 것이다. 저금리로 돈을 빌릴 수 있게 된 부유한 거래자들은
사람들에게 고용의 기회를 주게 될 것이다…”
그가 말한것에서 보듯, 존로의 이론은 미래의 케인즈주의를 따르는 경제학자들에게
사실상 전체적인 청사진을 제시한것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머피 교수의 말따나, “케인즈는 포스트 로우이언post-Lawian 이라
할 수도 있을 테구요...
“..존로의 사상은, 화폐를 교환수단의 기준으로 사용하고자 한 그들을 방해하고 있는
희귀금속의 가치를 뒤흔들게 될, 기묘한 통화를 구성하는 모든 이론이 이미 포함 되어
있었다. 그는 어려움 없이 종이돈으로 대체할 수 있었다. 돈은 단순히 유통수단으로서
정의 되었다.(가치저장의 기능은 무시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정의로 도출된 결론은,
어떤 반대도 오히려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일부 시민들이 법을
위반하면서 화폐를 저장해놓고 있었으나 정부는 이를 법적으로 처벌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되었고 그로인해 시스템을 유지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개인이
종이지폐를 저장하게 된 것은 값싼 종이 돈과 비교하여 희귀금속이 비쌌기 때문이기도
했다….”
위의 Charles Rist의 요약처럼 현대의 중앙은행장들과 각 정부기관들이
병든 경제를 살린다는 명목으로 양적 완화를 결정하게 된,
그렇지만 무조건 비난만 할 수는 없는...
1720년에 내린 존로의 처방이 현재에도 유효한 상태라는건
사실 별로 놀랄일이 아닐런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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