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문헌:

http://blog.daum.net/ssyong65/15267327
http://blog.daum.net/ssyong65/15267328
http://blog.daum.net/ssyong65/15267329

1. 튤립광풍

"튤립광풍"이란 말은 적어도 경제학 분야에서 사실상 하나의 은유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죠. 메타포어, 은유라고 표현한 이유는 17세기에 발생한 네덜란드의
투기광풍에 관한 구체적 논의를 The New Palgrave Dictionary of Economics라는
저명한 경제학 사전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것이 그 한 이유라고 합니다.

 


그 대신 이 사전의 저자인 Guillermo Calvo는 "어떤 가격이 경제 펀더멘틀로 완전히
설명하기 어려운 동향이 나타나는 상황"으로 튤립광풍을 정의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Calvo는 "완벽한 예측이나 합리적 기대라는 전제하에서는 수요/공급의 분석 기준에
부합하기는 하지만, 수요와 공급의 균형이란 튤립광풍과 유사하다"는 자신의 주장을
위해 수학적 모델의 사례로써 이후에도 계속 튤립광풍의 사례를 인용했다고 하네요.
이 또한 은유적이라 하겠죠...

 


Brown대학의 경제학교수인 Peter Garber는 Tulipmanaia에 대해 오래동안 연구하고
정력적으로 저술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Garber는 튤립광풍에 대한 그의
글에서, 1634~37년, 암스테르담 튤립시장의 펀더멘틀을 연구하고자 했다고 스스로도
밝힌 바 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튤립광풍이 역사적으로 어떤 위치에 있는지
개략적으로 살펴보고, 1634년 홀란드의 튤립과 튤립시장의 논의를 시작하면서,
'비정상적인 대중망상과 집단광기의 보고서라는 주제로 헌신한 Charles Mackay의 글을
7페이지에 걸쳐 집중적으로 파헤쳤던' 이 양반의 글을 인용하려 합니다, 본문에
들어가기 앞서, 가버는 야생튤립이 도대체 무엇이었나에 대한 것부터 글을
시작합니다.

 


.....

 


양성화(암술과 수술이 다 있는)식물이자 구근식물인 튤립은 씨앗을 뿌리거나 암술에서
봉오리가 피었을 경우, 두가지 방법을 모두 사용하여 재 생산할 수 있는 식물이다. 이
봉오리를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재생산 하는 것은 무성생식을 이용하는 것 인데
적절하게 재배만 한다면 또 다른 구근을 얻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튤립은 4~5월에
꽃망울을 터뜨리고 약 1주일간만 개화한다. 구근은 6월경 땅에서 옮겼다가 9월경
반드시 다시 심어야 한다.

 


일부 튤립이 비정상적인 모양을 갖는것은 모자이크 바이러스에 감염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패턴은 씨앗을 뿌려 재생산하는 방식으로는 복제할 수 없다. 변종튤립은
복제가 가능한 새로운 구근에서 (바이러스에)영향을 받은 봉오리를 재배하므로써
얻어질 수 있다. 씨앗은 평범한 튤립이 새로운 패턴을 만들어내는 바이러스에
감염되어야만 만들어질 수 있다. 바이러스에 억눌린 튤립은 재생산률이 낮아진다.
따라서, 더욱 이국적으로 보이는 패턴을 가진 튤립은 더욱 재생산율이 저하되고,
구근이 감염되지 않은 정상적인 튤립에 비해 더욱 가치가 있으며 더 많은 희소성을
갖게 된다......

 


.......

 


구근시장에 대한 Garber의 견해는 프랑스에서 구근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고
투기꾼들이 튤립시장에 진입하기 시작한 1634년 말까지는, 전문적인 재배업자로
국한되어 있었음이 틀림없다는것을 보여 줍니다.

 


"...이 당시 바이러스에 감염된 "희귀한 구근"은 그램당 대략 1/20정도의 표준무게로
거래되었다. 일반적인 구근은 특정 구근을 위탁하지 않고 계약할 경우, 1,000 azen,
또는 1파운드(1 파운드는 하를렘에서 9,782 azen, 암스테르담에서는 10,240 azen으로
교환) 단위로 거래 되었다..."

 


위에 언급된 튤립의 생장주기에서 보듯, 튤립시장이 9월 부터 6월까지 9개월 동안의
선물시장을 열도록 했다는 것은 중요한 점입니다. Garber는 1636년에 공식 선물시장이
시작 되었으며, 시장이 붕괴했던, 1637년 2월 까지 선물시장이 구근 거래를 위한
1차적 수단이었다는 사실을 확인 해 줍니다.  1636년 여름, 튤립구근에 대한
선물거래는 입찰과 수수료를 제한하는 몇가지 규칙으로, "Colleges"라고 불리는 술집,
혹은 여인숙으로 점차 대치되기 시작합니다. 구매자들은 "wine money"라고 불리는
거래마다 그 계약된 금액의 일부를 내야만 했는데, 그렇지 않으면 판매자나 구매자
모두 선물로 인한 매매차익을 얻지 못했다고 합니다.

 


"...정해진 날짜가 되더라도, 구매자는 거래를 청산하기위해 필요한 현금을 가지고
있지 않은것이 일반적이었고, 판매자들 역시 구매자들에게 주기위한 구근들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따라서 이 거래는 계약과 예측만으로 정해진 가격이었기 때문에,
계약시점에서 정해진 가격과는 다르게 결재되므로써 청산 될 수 있을 뿐이었다.
이러한 계약은 시장에서 계속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따라서, 시장이 붕괴되었을 때,
순량(net)이라기 보다는 총수(gross)의 포지션에서 튤립은 대량 방출 될 수 밖에
없었다...."

 


1637년 2월 시장이 붕괴하던 시점에서, 실물(튤립구근)없이 오직 선물시장에 의해
성사된 거래가 폭증 합니다. 하지만 구근은 6월까지 인도 될 수 없었죠. Garber는
이러한 선물거래에서 정해진 가격이나 청산일에 대해서는 자료가 명확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다만, 대다수의 청산된 거래에 근거한, 일종의 기준가격이 만들어진것으로
보인다는 추측은 가능하다는 생각을 한것 같습니다.

 


어쨌든, 희귀한 구근에 대한 수요는 1635년이후 계속적으로 증가, 상상을 초월하는
높은 가격으로 거래되기 시작합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현상은 일반 구근에도 투기가
시작된 1636년 11월 까지였습니다.  N.W. Posthumus는 이 사건이 일어난 시기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증언합니다.

 


"...일련의 사건들은 아래처럼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1634년 말에, 새로운
전문적이지 않은 일반 구매자들의 활동이 시작되었다. 1635년 중반으로 가면서,
가격은 빠르게 상승했고, 한편으로는 사람들이 신용을 살 수 있었으며, 일반적으로
귀중품에서 튤립으로 가치재가 옮겨졌으며, 동시에 배당식 판매 기법이 도입 되었다.
대략 1636년 중반쯤, colleges에서 나타난 현상은, 이용이 불가능한 구근의 거래가
시작된 직후, 그해 11월에는 일반 품종으로까지 거래가 확대 되었으며, 구근은
파운드당 1,000 아젠에 팔려 나갔다...

 


.....1637년 2월 첫째주 시장이 붕괴되고 나서, 2월 24일 암스테르담의 튤립 재배
대표단이 1636년 11월 30일 이전에 판매 계약이 완료된 튤립에 대한 의무를 이행해
줄것을 요구했지만, 계약의 이행은 판매자에게 판매가의 10%를 구매자가 지불하므로써
계약 자체를 파기 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구매자들은 이러한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네덜란드 당국들은 모든 구근의 거래를 중지하는 것으로 4월 27일 그들의
계획을 일단락 했다. 그렇지만, 판매자들은 이 금지기간 동안 선물가격이 아닌, 시장
가격으로 계약된 구근을 팔 수 있었다. 구매자들은 당국이 결정한 결재가격과
시장가격이 다른것에 대한 책임이 있었다. 이것이 시행되자, 재배업자들은 6월,
드디어 햇빛을 보게된 구근을 시장에 풀었다...."

 


Garber는 더 많은 선물 계약이 매도 되었는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하를렘시의 해법이
포츠머스 시에서 언급된 사례로 보아, 계약금액의 10%가 아닌, 3.5%만을 지불하므로써
구매자들이 계약을 취소하는것에 동의했다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Garber는 현대적 구근가격에 따른, 18세기 튤립과 히야신스의 가격을 차례로
논한 다음, "이것이 "튤립광풍" 이야기의 전부인가?" 라는 말로 이 사건의 중요성이
경제학적으로 크지 않다고 단정 짓습니다. 그는 17세기 네덜란드의 경제 역사에 대한
수많은 글을 쓰는 과정에서, 결국 투기광풍이 휩쓸던 그 짧은 기간동안, 실제로
네덜란드의 자원 분배에는 영향이 거의 없었다는 생각을 가진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구근이 9월에 심어서 6월까지 옮겨질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1636년 11월 부터 1637년 1월까지의 버블이 정점이었을 당시, 이미 계약된
구근보다 더 많은 구근을 재배하기에는 너무 늦은 시기 였다는것을 알 수 있습니다.
Garber는 튤립 가격이 폭락했음에도 계약하는데 필요한 결재액이 매우 적었다는것을
고려해 보면 부의 이전은 얼마 안되었다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의
주장과는 다르게 1637년부터 38년에 암스테르담에서 파산이 두배로 늘어났다는 점은
그의 접근에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었다는 점을 반증하는 것일 겁니다. 이 부분은 좀
더 뒤에가면 자연스럽게 증명 될것으로 생각합니다.

 


Garber는 "구근 투기가 , 적어도 투기 "광풍"이 일었던 1634~37년의 대부분의 경우,
그러나 분명히 광기가 아니었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일반 구근에 대해서 투기했던
마지막 한달 만이 버블의 가능성이 그나마 남아 있었을 뿐이라는 주장이었습니다.
실제로, 일반 구근인 Witte Croonen의 가격은, 1637년 대략 26배까지 뛰어 올랐고,
1637년 2월 첫째 주 최고치에서 1/20로 하락을 계속한것으로 나옵니다.

 


또 다른 예로, 경제 역사학자인 Charles P. Kindleberger역시 광적인 버블에 대해
오래동안 연구해 온 사람입니다. 그의 책 Manias, Panics, and Crash(광기, 공황,
그리고 붕괴) : A History of Financial Crisis(금융위기의 역사) 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가버의 주장을 설명합니다.

 


"...100년전 Lubeck 위기나 1634년의 Tulipmania와 같은 광기(Mania)는 은행업이
18세기에 시작된 후 확대 되어 온 통화형태로 특징짓기에는 너무 부족하고
고립(단절)되어 있다. Peter Garber는 오래동안 튤립광풍을 다루어 왔다. 그는
"버블"을 일반적인 경제 변동성과 구분해서 사용했다. 후자(Tulipmania)는
"Fundermental"에 의해 결정되었던 반면, 전자(Lubeck 위기)는 가격을 정하는
본질적인 속성(set of Pricec that fundamentals would call for)에서 벗어난 상태로
규정했다. 그는 튤립광풍을 버블이 아니라고 생각했으며, 일부 튤립 가격의 엄청난
상승을 감당했던 네덜란드의 경제적 기초체력이 버블의 발생을 어렵게 했다고 주장
했다...."

 


그런데 Kindleberger는, 그의 서유럽 금융사(A Financial History of Western
Europe)에서 "버블의 전성기를 구가할 수 도"있었던 것으로써  튤립광풍을
언급했지만, 그의 책 전부를 통 털어 그 튤립광풍에 대한 설명은 단지 5줄을
할애하는것에 불과.... 킨들버거가 현재 가장 주목받고 있는 주류 경제 역사학자 중
하나라는 점에서 , 그의 방식으로 판단컨데 1634-1637년에 암스테르담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 역사적으로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보는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것은
어쩌면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위에 언급되어 있는, 특히 "...은행업이
18세기에 시작된 후 확대 되어 온 통화형태로 특징짓기에는 너무 부족..."하다는
부분이 판단의 근거가 된다고 보기 때문인데, 킨들버거는 "Manias, Panics, and
Crash" 제 4장에서 통화 팽창에 대해 이렇게 씁니다.

 


"...투기적인 광기는 화폐와 신용의 팽창을 통해 점점 그 속도를 늘여가며, 어떤
경우, 어쩌면 신용과 화폐 팽창의 초기 단계가 원인이 되어 시작된 것일수 있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특정한 광기를 돌아보면 붕괴나 공황이 뒤따라 일어났다는 것과
무엇이 잘못되어 가고 있었는지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다양한 버블과 뒤 이은 붕괴는 통화팽창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었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그럼에도, 킨들버거는 암스테르담에서 만들어진 튤립광풍이 통화팽창에
기인한것이라고 믿지 않은 것에 대한 분명한 이유를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

 


그래서....다음 글은 암스테르담 은행과 관련된 이야기를 조금 하려 합니다. 미리
요약하자면, 튤립광풍이 일어난 당시의 암스테르담 은행은 신용관리에 대한 일은 하지
않았으며, 단지 정화 예금 대비 어음만을 발행했을 뿐이라고 알려져 있었습니다.
따라서, 투기 버블이 발생하는데 필요한 화폐공급의 갑작스런 증가를 경험하지
않았다는 킨들버거의 관점은 그 가능성이 매우 높기는 하지만.....그러나 실상은..?
매우 극단적으로 증가했지요...그 이야기를 할 것입니다...

 

2. 자유주조제, 암스테르담은행

 

 

로마제국이 몰락한 뒤, 유럽 곳곳에서는 여러가지 다른 화폐시스템이 횡행했는데,
각국의 왕들은 기존에 그들이 가진 금화나 은화를 없애기 위해 안달이 났었다고
합니다. 우선 이 당시 동전들이 일반적으로 개별 주(individual states)들에 의해
각각의 비동치화된 법정화폐로써의 가치비율이 정해졌던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런
주화제조라는 최고의 권리가 유럽내 모든 주권국가들에 의해 지나치게 남용되고
있었다는 사실이 보이지 않는 가장 큰 문제였다고 합니다.

 


또한 비잔티움(콘스탄티노플:동로마)이 무너진 뒤, 기존에 부여되었던 주조권에 대한
신성한 이미지가 대부분의 동전에서 사라지게 되었는데, 물론 이러한 신성성은,
동전이 변화되고 있었음에도 대부분의 국가들은 말할 것도 없었고, 미신에 사로잡힌
대중들에게까지 여전히 남아 있었던 탓에, 그리고 무엇보다도 왕들의 입장에서는
신성성이 제거된 동전의 구성이나 가치를 만들어낸다는것이 상당히 어려웠었기
때문에, 따라서 강제적인 가치조정을 통해 이를 해결하려고 하므로써, 금화나 은화는
유럽대륙의 정치적 변화와 더불어 애꿎은 고통을 받게 된것이...당시의 화폐적
시대상황 이었습니다.

 


이는 곧 민중에 대한 핍박과 같은 의미가 되었습니다. 동전(민중)의 "착취당하고",
"갈라지고", "비명을 지르는"것은 훗날, 대부분의 유럽 지배자들이 혁명으로 인해
처형되었던, 17세기가 시작될 때까지 계속 이어졌는데, 그 와중에 왕들은 방탕한
생활과 전쟁으로 인해 텅 비어버린 국고를, 화폐의 평가절하를 이용해서 금방 다시
채워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 내게 되었습니다.

 

 


그런점에서 강력한 왕권을 휘둘렀던 챨스5세는 화폐가치의 변경에 대해 가장 큰
비난을 받아야 할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만행이라고 밖에는 할 수 없었던 네덜란드
내의 이러한 화폐변경 의도는 결국 1524년, 통화법령의 포고를 불러오게 되었고, 결국
챨스5세는 금화의 가치를 은화의 가치에서 9배....10배...최대 11과 3/8배까지
올려버리는 참혹한 화폐개혁을 단행 했기 때문입니다.

 

더욱 큰 문제는 챨스 5세의 이런 조치가 1524년 이전의 금화 가치로 낮춘것이 아닌,
은화의 가치를 오히려 거의1/10 수준으로 절하시킨 효과를 불러온 것이었기 때문에
1542년, 네덜란드 국민들은 이렇게 된 이유도 모른채 엄청난 고통을 무조건
감수해야만 했다는 것입니다....

 


그로부터 4년 뒤인 1546년, 챨스 5세는 다시 한번 가격을 후려 쳤는데, 금화의 가치를
은화 대비 무려 13배나 갑작스럽게 올려 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조치들은 처음에는
은화의 평가절상, 그다음에는 은화에 대한 시장가치와 관련된 평가절하로 이어지고,
결과적으로 화폐의 과대평가는 정상적인 유통을 벗어난 화폐의 평가절하를 가속화
시켰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흔히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한다’(Bad money
drives out good)라는 그레샴의 법칙으로 잘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결국 은화의 가치는 54그레인스파인(grains fine/ 형량의 최저 단위 = 0.064g)에서
35그레인스파인으로 떨어졌습니다. 따라서, 홀란드(네덜란드)의 최우선 유통 수단이된
은화는 이 조치로 1523년의 가치에서 무려 1/3 수준으로 떨어지므로써 화폐공급을
그만큼 감소시키게 되었으며, 금의 가치 대비 거의 50% 가까이 증가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장치로 인해, 국민들의 피를 짜내는 고통을 담보로 챨스5세는 그의 텅빈
국고를 다시 채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1546년에 일어난 이 말도 안되는 조치에 대해, Del Mar는 "그 빨대는 오래동안의
고통을 참아내도록 강요받아온 시민들의 인내심을 부셔버린 것"일지도 모른다고
평했습니다. 거센 화염속에서 혁명의 불길이 이글거리며 타오르고 있음을, 챨스5세
역시 그의 통치기간 동안 충분히 감지 할 수 있었음에도 방치, 이른바 1566년
"거지들의 연합 Confederation of Beggers"이 결성된 뒤, 그로부터 6년 후 혁명을
공식 선포하게 됩니다.

 

 


혁명정부가 추진했던 첫번째 조치중 하나는 "자유로운" 또는 "개인적인" 주조권의
보장이었습니다. Helfferich는 이를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금속이 돈으로 변하는 규제를 푼, 가장 많이 알려져 있으며 가장 단순하고 특별한
사례는 "자유로운 주조권" 또는 "민간 계정으로 주조하는 것"이다. 국가가 주조권을
포기하게 되면 금속의 양이 얼마가 되든지 상관없이 화폐를 주조할 것이며, 금속을
건네받은 받은 사람들의 부담은 전혀 없거나 최소한의 비용만을 부담하게 될 것이다.
금속을 제공한 사람들은 화폐주조세를 전혀 감면받지 못하거나 일부만을
감면받으므로써 건네준 금속대신 동전으로 받게 된다..."

 

 


자유주조권에 대한 아이디어는 포르투갈로부터 그 컨셉을 물려받은 것이라고 하는데,
네덜란드 동인도(Dutch East Indians)에서 다시 네덜란드로 가져온 것이라고 합니다.
이 당시 자유주조권의 시행은 인도의 무슬림 정부를 악질적으로 변질 시키키기도
했으며, 1555년 마스카렌하스Mascarenhas가 이를 다시 카피했다고도 합니다....

 

 


당연히...자유주조권은 단숨에 성공했습니다. Helfferich는,


"....민간이 미국에서 획득한 금괴와 은괴의 소유자들은, 유럽의 왕자들이 강제로
부과하는 화폐주조세를 기피하기위해 그동안 부질 없는 노력을 계속 해왔지만, 이제
도망가기 위한 문이 열리게 되었다. 그들은 가지고있던 금괴나 은괴를 홀란드로
보내기만 하면, 길더(Guilder/네덜란드 화폐단위)나 듀켓(Ducats/금화 또는 은화의
현금), 은행 기장용 통화라는 명목하의 은소재 금속으로 바뀌었다...."고 당시의
상황을 설명합니다.

 

 


17세기가 시작되면서 네덜란드는 유럽인들과의 교역 뒤에서 자국 화페에 대한 힘을
행사하기 시작합니다. 아시다시피 이 당시 홀란드의 수도인 암스테르담은 무역의
중심지로써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초기 암스테르담의 화폐는 이웃 국가들의
동전을 제일 우선시 했으며, 자국의 동전은 그 다음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암스테르담에 들어와있던 수 많은 종류의 해외 동전들은 닳거나
손상되었고, 결과적으로 "법정화폐 기준" 이하인, 암스테르담 통화 대비 약 9%정도의
가치가 감소하게 됩니다. 따라서, 이러한 유통구조상 이미 평가절하된 기존동전을
새로 만들거나 하므로써 추가로 집어 넣는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 해지게 되었습니다.

 


때문에 낡은 동전을 대체할 완전히 새로이 주조된 외국 동전이 유통될 시, 이
동전들은 신속하게 징수되었고, 다시 녹여, 금괴로 만들어져 수출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후 이러한 역진적인 방식은 점차 보편적으로 되어갔으며 상당히 빠르게 확대
되었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통화의 가치하락은 결국 법정통화인
동전들의 상태를 악화시킨데에 따른 것으로, 돈의 가치를 일부러 과대평가 시키므로써
악화(惡貨)의 양화(良貨)화를 가속 시킨 것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이러한 일련의 상황들을 바꿔놓은것이 바로 1609년에 설립된 암스테르담
은행이었습니다. 이 은행은 모든 정화(正貨)거래에 대한 독점권을 가지고, 고리대금을
억제, 거래를 용이하게 했지만....그러나 놀랍게도 이 은행의 주요 기능이
유통과정에서 동전을 위조하고 예금의 인출을 남용하는 것이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

 


일반적으로 동전은 표면가치에 근거한 것이 아닌, 금속의 무게나, 동전이 가진
본질적인 내재적 가치에 의해, 예금 대비 은행에서 발행된 돈이라고 알려져 있었고,
그러한 신용을 바탕으로, 비로소 예금으로써 받아들여질 수 있었습니다. 암스테르담
은행에서 발행된 새로운 형태의 돈은 암스테르담 시에서 그 가치를 보증했으며,
안전하고 편리성까지 갖추었기 때문에, 이후 동전에 대한 프리미엄이라든가,
환전수수료를 받게 만든 뱅크머니의 직접적인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후
여러형태의 프리미엄(4~6¼%)이 생겨났지만,  동전의 (실제가치)비율은 표면, 또는
명목 가치 이하로 평가절하 되어 나타나는것이 일반적이었다고 합니다.

 

 


이 은행이 제공하는 서비스중 하나는 은행의 예금계좌를 이용, 지급인과 수취인이
서로 만나지 않는 상태에서 자금을 이동시키는 것 이었습니다. 이를 현대식
금융용어로 말하자면 지로제(制), 또는 은행 대체(代替) 제도(Giro Banking
Operation)라고 합니다. 이 서비스의 실시로 은행에서 직접 예금을 인출하는 일은
매우 드물게 발생했고, 또 매우 대중적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만일 예금자들이 자신들의 정화를 다시 찾고 싶어하면, 자신이 가지고 있던
뱅크머니에 프리미엄을 붙여서 되 팔았는데, 뱅크머니를 구매할 사람들을 찾는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게다가, 은행계좌를 갖고있지 않는 사람들로 인해
뱅크머니에 대한 수요는 늘 있었다고 합니다. 아담스미스는 국부론에서 이와 관련된
글을 실었습니다.

 

 


"...은행의 지불 청구로, 은행 신용의 소유자들은 프리미엄의 손해를 보았다. 600만
길더 그 이상의 금액을, 암스테르담에서 협상한 모든 어음을 이용하여 추가로 요구한
암스테르담시의 보증은, "어음의 불확실성을 모두 제거하기위해" 뱅크머니에서
요구받은 금액 전부를 지불해야만 했고, "뱅크머니에대한 특정한 요구가 불가피하게
일어날 경우"를 대비, 은행 계좌를 갖고 있도록 모든 상인들을 강제했다...."

 

 


아담스미스는 뱅크머니를 발행한 암스테르담 은행의 구조체계를 설명하면서, 은행은
금괴가 가진 그 당시 화폐가치의 대략 5%이하에서, 금괴나 은괴로 예금된것에 대한
장부를 적고(계좌개설) 그것으로 신용(뱅크머니)를 주었다고 합니다. 동시에 은행
신용으로써 발행된 어음을 가진 예금자들은 6개월 이내 은행에 예금된 금괴를 인출할
수 있는 영수증을 받았는데, 이는 예금자 또는 지참인으로써의 자격을 보증한것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금괴를 되찾으려는 사람은 몇가지를 제출해야만 했는데,  1)금괴에 대한
영수증, 2)장부에 기입된것과 같은 뱅크머니, 3) 은괴에 대한 수수료 0.25%, 또는
금괴에 대한 수수료 0.5%를 지불해야 했다고 합니다.

 

이 설명에 따르면 추가로 6개월을 연장하는데 필요한 연장 수수료를 내지 않고,
중간에 맡긴 금괴를 회수하지 않은 상태에서 만기가 되면, 그동안 받아왔던 수수료를
예금에서 강제적으로 은행에 귀속시키거나, 신용을 명의변경장부(Transfer books)에
작성해야만 했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관례로 판단컨데, 은행은 예금자가 6개월의 기간내 예금을 회수 하지
않을경우, 예금 보관에대한 5%의 수수료를 강제할 수 있는 합법적인 권리가 있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경우에 가장 높은 수수료를 물렸었는데, 금이 보관상 리스크가 가장
크다는 사실 때문이었으며, 또 가장 가치가 높았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금괴에 대한
영수증은 만기까지 있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 일이 빈번하게 일어날 수
있는 경우라면, 금예금 이자가 예금 수수료 보다 더 높았을 때 뿐이었습니다. 이러한
시스템은 암스테르담은행의 의무와 결합하여 두가지의 분리 수단을 창조해
내었습니다. 아담 스미스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금괴를 예금하여 은행신용과 영수증을 획득한 사람은, 은행신용이 만기가 되면
환어음(bills of exchange)을 지불해야 한다. 그리고 그는 금괴의 가격이 오르거나
내리는것을 스스로 판단하여 계속갖고있거나 판다. 영수증과 은행신용을 함께 장기간
소유하는 일은 거의 없었으며, 그렇게 해야할 만한 일이 일어나는 일 또한 없다.
영수증을 갖고 있는 사람, 그리고 금괴를 갖고 나오기를 원하는 사람은 늘 충분한
은행 신용과 일반적인 가격에 살 수 있는 뱅크머니를 구할 수 있었으며 , 그리고
뱅크머니를 갖고 있는 사람과 금괴를 갖고 나가려는 사람은 늘 똑 같은 양의 풍부한
영수증을 찾아낸다.

 

 


뱅크머니의 소유자들은 그가 원하는 금액 만큼의 은행 영수증을 만들지 않고서는
금괴를 가질 수 없다. 만일 그가 가진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그는 그것(뱅크머니나
영수증)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서 이를 구매해야만 한다. 영수증을 갖고있는 사람은
금을 살 수 있는 구매력을 가진, 은행가보다 5%가 높은 주조가격(Mint Price)의
뱅크머니를 구입해야 했다. 그러므로, 5%의 환전 수수료(프리미엄)는 금 구매에 따른
일반적 비용으로, 가상이 아닌(신용창조) 실제 가치에 대한 지불이었다. 뱅크머니를
가진 사람은, 그가 영수증을 구입할때, 주조 가격보다 높은 일반적인 시장가에서
2~3%의 프리미엄을 주고 영수증을 구입한다. 이것 역시 금을 획득할 수 있는 구매력을
가진다. 따라서 그가 지불한 영수증의 가격은 마찬가지로 실제가격에 대한 비용
지불이었다. 영수증의 가격과 뱅크머니의 가격은 금의 가격과 전체 가치 사이에서
복합적으로 만들어진다...."

 

 


스미스가 위에서 설명한 것과 똑같은 시스템이 은행에 예금 되어있는 동전에도 역시
적용되었습니다. 스미스는 주화를 예금하는것이 금괴를 예금하는것보다, 은행 권력에
점령당하기가 더욱 쉬웠다고 단언합니다. 은행에 6개월간 보관해주는 수수료에 대한
비용을 지불하는, 일반적으로 뱅크머니의 (스미스가 5%라고 지적한)높은 환전
수수료로 인해 영수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그만큼의 손실을 입을 수 밖에 없게
되었기 때문인데, 그래서 영수증이 만기 되었을때 사용된 뱅크머니의 액수는
뱅크머니의 총액과 비교해 볼때 매우 적었다고 합니다.

 

 


"....암스테르담 은행은 지난 수십년동안 유럽의 금을 보관하는 거대한 창고였지만,
거기서 사용된 영수증은, 그들의 표현대로 하자면, 은행으로 떨어지는, 또는 만기까지
남아있는경우가 매우 드물었다. 뱅크머니의 가장 큰 부분은 은행 장부에 기입된
신용인데, 금괴 딜러들이 예금처럼 그것을 계속해서 만들어 내거나 보증하므로써,
오랜세월 동안 창조해 왔던것으로 생각된다...."

 

 


은행은 암스테르담 시에서 높은 이윤을 얻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앞서 서술한
창고업과 환전수수료를 위한 뱅크머니의 판매외에도, 신규 예금자들이 계좌를
열기위헤 10길더의 수수료를 지불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예금자들이 그 다음 두번째
계좌를 개설할때는 3길더의 수수료만을 냈다고 합니다. 이체시에는 2길더의 수수료를
내야했고, 600길더 이하의 이체일 때는 예외였는데, 600길더 이하에 대한 수수료는
6길더(소액 이체를 줄이기 위해)였다고 합니다. 예금자들은 한 해에 두번 그들의
계좌에 잔고를 유지하도록 은행으로부터 요구 받았다고 합니다. 만일 예금자들이 이를
이행하지 못할 경우, 25길더의 벌금을 물어야 했습니다. 이외에도 3%라는 수수료는
만일 예금자가 자신의 계좌에 있는 금액보다 더 많은 이체를 해야할 경우 부담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암스테르담 은행이 업무를 시작할때는 신용(Credit)기능을 수행하지 않았으며, 모든
뱅크머니를 100% 정화로 보증하는, 예금 은행으로 제한 되어 있었습니다. 암스테르담
은행의 행정은 소규모 시정부 관리들로 위원회가 꾸려 졌는데, 이 위원회의 역할은
은행의 기밀 업무를 담당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위원회의 설립취지부터 본래가
비밀스러웠기 때문에, 개인 예금자들이 1657년 초까지 그들의 계좌를 이용해서 수표를
과다 발행했었던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것은, 생각해 볼 것도 없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을 겁니다.

 


그 해 말, 암스테르담 은행은 동인도 회사와 암스테르담 자치단체에 엄청난 대출을 해
주기 시작 했습니다. 이후 1790년까지 이루어졌던 대출은 뱅크머니에 대한 프리미엄이
보통은 4%대 였지만, 때로는 6.25%까지 높아지기도 했다가, 후에 2퍼센트까지
떨어지면서....결국, 사라지고 맙니다. 1790년 말, 이 은행은 10%할인된 가격으로
뱅크머니를 소유한 사람들에게 은을 팔았던 사실에 대해 공시적인 통지문을
발행하므로써 사실상 채무불이행, 파산상태가 되었음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이에따라 암스테르담 시는 1791년 은행을 매각.... 1819년 12월 결국 영원히 문을
닫고 맙니다.....



3. 자유주조제, 암스테르담은행 2

 

 


암스테르담 은행의 안정성과 결부된 자유주조(제)의 효과는 암스테르담에서는
직접적으로, 일본에서는 그보다 못하긴 하지만, 다량의 희귀 금속을 획득하기위한
경로를 찾도록하는 자극제가 되었는데, 그래서 발견한 곳이 신대륙...바로 아메리카
대륙이었습니다....

 

 

 

 


1492년 미국에 도착한 콜럼버스와 1519년 멕시코를 침략한 에르난 코르테스(Hernan
Cortes) 이후, 유럽으로 희귀금속이 유입되기 시작한 것은 주로 스페인을
통해서였습니다. 아메리카 대륙에 매장된 풍부한 광물로 인한 생산은 유럽의 안정적인
금속생산과 결부하여 산업및 상업활동을 빠르게 확대시킨 직접적인 계기가 되어
궁극적으로 유럽의 물가를 낮추는 일종의 트랜드를 만들어 내었습니다.

 

이후, 드보르작이 찬양한 이 "신세계"에서의 광물채취는 1572년 페루의 Huancavalica
수은 광산이 발견된 뒤로 더욱 증가하게 됩니다. 거기에 기술적으로도 16세기 중반에
발명된 수은을 섞는 기법인 아말감화(Amalgamation Process) 덕분에 은을 생산하는
프로세스의 효율성을 상당히 증가시켰다고 합니다.

 


그러나 일본의 은광산업 역시 같은 시기에 팽창했지만, 수은 - 아말감을 합성시키는
기술이나, 그로인한 효율적 생산에 대한 이익을 누리지는 못했기 때문에, 홀란드
동인도회사가 1611년부터 17세기가 끝날때까지 희귀 금속의 생산을 위해 접근한
일본과의 무역에서 실질적인 독과점의 지위를 누릴수 있었다는 사실은 당연한
것이었으며, 이후 벌어질 튤립광풍의 중요한 원인을 제공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했습니다.

 


"희귀금속의 역사"를 저술한 Alexander Del Mar는 바로 그점을 지적했는데, "1624년
부터 1853년까지 홀란드는 일본과의 무역을 허용받은 유일한 유럽인들이었고,
일본에서 수출되는 전체 희귀금속중 약 절반을 가져가기 위해" 일본과의 관계가
관리되고 있었음을 적시 했습니다.

 

 

 

 


또 "생산의 관점에서 본 16세기 인플레이션"이라는 글에서 Dennis O. Flynn이 지적한
바에 따르면,

 

 

 

 


"...중부유럽과 일본 광산에서의 생산과 결부된 미국의 은 생산은 시장가치를 서서히
떨어뜨리기에 충분한 은의 공급을 전세계적으로 증가시켰다. 거기서 16세기 가격
인플레이션(Price Inflation)이 일어났다. 미국과 미국이 아닌 곳에서의 광산에서
생산된 엄청난 양의 은은 유럽 광산업자의 수가 증가하면서 은의 시장가치가 생산비용
이하로 떨어지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외에도 Flynn은 은의 중국 유입에 관한 의견에서, 영국에서 차의 수요가
증가하면서 차를 수입하기위해 은을 거래하게 된 것이 아니라, 중국에서 은의 수요가
증가하면서 유럽에 비해 은의 가치가 높아지게 된것이라고 주장 했습니다. 영국에서
은을 들여올 방법을 궁리하던 중국은 차가 가장 유용한 방법이란 것을 알게 되었으며,
이런 관점에서 중국인들은 은은한 향을 자랑하는 차로 영국인들을 '유혹'해서 수요를
발생시킨 후 자국의 경제에 은을 유입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고 합니다...-다시쓰는
근대 세계사 중 각주 부분)

 

 

 

 


초기 MIT총장인 Francis Amasa Walker는 이 관점이 옳았음을 입증했습니다.

 

 

 

 


"...수의 값, 또는 화폐단위의 변경을 충분히 숙고한 뒤, 전체 유럽에서 형성되어
왔던 가장 정확한 계산으로, 서인도를 발견한 이래 식료품을 포함한 모든것들의
가격이 3, 4배가 상승했음을 발견했다...."

 

 

 

 


아래의 표는 당시에 엄청난 양의 금속이 유입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이는 앞의 글에서
적었듯, 스페인에서 암스테르담으로 유입된 금괴, 또는 은괴의 무역과 네덜란드
해군이 갈취한 보물의 점유에 기인한 것입니다.

 


 Violet Barbour의 글입니다.

 

 

 

 


"1628년에 네덜란드의 전설적인 제독 Piet Heyn에 총 1,150만에서 1,500만 플로린으로
추정되는, 보석과 그외 귀중품을 제외하고 순수하게 177,537파운드의 은이 실려있는
스페인의 보물선이 포획되는 유명한 사건이 발생했다. 그 처럼 굴러들어온 복이
일어났던것보다 더욱 중요한 일은, 신세계와 스페인을 통해 스페인과의 무역으로
이익을 얻은, 페루와 멕시코의 광산으로부터 카디즈로 2년에 걸쳐 홀란드 상인들이
가져온 은에 대한 지분이었다.

 

2년 동안에 걸쳐 공유한 지분이 무엇이었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다만 그와 같은
일이 계속되지 않았다는 일부 사실들이 17세기 후반에 드러나게 되었다. 선박과
함대에의해 가져온 보물의 15~25%를 홀란드가 가져가는것이 일반적이었지만, 때로는
그보다 많이, 때로는 프랑스나 제노아가 주장했던 액수 이하로 떨어지기도 했다...."

 

 

 


(Earl J. Hamilton의 저서 American Treasure and the Price Revolution in Spain 중
발췌, 150page)


http://www.applet!!!-magic.com/treasure.htm

 

 

 

 

 

 


Del Mar의 같은 주장입니다.

 

 

 

 


"...진실한 Abbe Raynal은 몇 마디 단어로 전체적인 문제를 설명한다. 포루투갈이
인도의 것을 빼앗는 동안, 홀란드는 포르투갈것을 강탈했다. "동인도회사의 배는
반세기도 채 안되는 동안 아시아의 고통을 가득실은 300척 이상의 포르투갈 선박을
획득, 막대한 이익"을 가져갔으며, 수많은 동양의 금을 강도질하여 두배의 이익을
암스테르담에 전해 주었다...."

 

 

 

 


아래의 표는 가버나 킨들버거의 주장과는 달리 네덜란드에서 화폐의 공급이
예외적으로 크게 늘어났었다는 증거를 보여줍니다.

 

 

 

 


(Jan A. van Houtte and Leon van Buyten, “The Low Countries”중에서 발췌.)

 

 

 

 

 

 


위의 표에 나온 수자는 튤립광풍이 일어난 1634~37년중 후반기 동안인 1630-38년의
기간동안 그 시기에 화폐의 공급(특히 은silver)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는 점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아래의 그래프는 암스테르담 은행의 예금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 그래프를 보면,
네덜란드에서 저축이 예외적으로 증가한 시기가 대략 1625년에서 1650년까지인 것으로
나타납니다. 디테일하게 세분화하면 1633년부터 1638년까지의 예금이 500만
플로린에서 800만 플로린으로, 무려 60%가 증가했다고 합니다....

 

 

 

 

 


(하버드 경제연구소 The International Economy and Monetary Movements in France,
1493?1725 중 발췌)

 

 

 

 

 


뭐...위의 자료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합니다. 위에 썼던 내용처럼, 암스테름담
은행의 자유주조와 홀란드내 활발하게 이루어진 상업, 그리고 무역이 전세계 곳곳에서
암스테르담으로 금괴나 은괴 그리고 동전을 끌어들이는게 했다는 것이죠. Del Mar의
글입니다.

 

 

 

 


"...자유로운 화폐의 주조를 장려하는 상황하에서, 엄청난 양의 희귀금속이 홀란드에
보급되었고, 그 결과 물가가 상승하게 되었는데, 이는 튤립을 키우는 이유가 된,
수시로 엄청난 가격에서 튤립을 사들이는 광기어린 호기심을 표현하는 형태의 하나로
나타난 것이다...

 

1648년, 30년 전쟁이후 홀란드 공화국의 독립을 승인한 베스트팔렌 평화조약(Peace of
Westphalia)이 체결되었을때, 은으로 자유롭게 주조된 플로린화는 유통이 금지되었고,
오직 금으로된 듀켓화(Ducat)만을 허용, 그러나 이것은 홀란드에서 법화로써의 가치를
갖지 못했다. 은괴의 수입을 약화시킨 이 제도는, 물가 상승을 억제했고, 결국 튤립
광풍을 끝내도록 압박했다..."

 

 

 

 


이 광기는 네덜란드 국회가 모든 계약을 취소한다는 결정을 내린 1637년 4월 27일,
이미 상당히 약화되어 있었다고 Del Mar는 말합니다.

 

 

 

 


문제는 튤립가격의 붕괴가 금융 충격의 대부분을 고스란히 흡수할 수밖에 없었던 구근
재배업자들을 상당 수 남겨놓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정부가 기본적으로 선물 시장에서
이루어진 모든 계약을 무효화시키자, 재배업자들은 새로운 바이어나 이미 계약했던
바이어들로 부터 발생된 재배 원가조차 회수할 방법을 찾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영국의 역사가인 Simon Schama는 이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어쨌든, 네덜란드 각 마을의 치안판사들은 사람들을 튤립광기에서 깨어나게
하는것보다 더 긴급한 사안은 없었기 때문에, 매우 공평한 자세로 이 문제를 들여다
볼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의 개입은, 병마개를 꼭 닫아 다시는 재발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안심시키위해, 투기를 위해 도망갔던 램프의 요정인 지니식 투기를
원상복귀시키도록 촉구하므로써, 서둘러 진행하게 되었다.

 

이를 좀 더 확장시켜보면, 그들은 가난뱅이에서 부자가 된 사람들의 것을 강제로
빼앗아 신속하게 다시 원래대로 되돌려 놓으므로써 무모함에 대한 처벌을 이미 내린,
운명의 여신 포르투나의 피할 수 없는 작전에 만족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판사들은 평범한 사람들을 타락으로 이끄는 투기가 가진 특별한 사악함때문에, 그
어리석음에 대해 설교하고 각인시키는, 소책자를 통해 교훈적인 캠페인을 실시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느꼈다...."

 

 

 

 

 

(뉴욕 커넬대에서 출판, Charles Wilson, Geoffrey Parker 공저,


An Introduction to the Sources of European Economic History 1500?1800 중 발췌
102 page

1635년부터 1800년까지 암스테르담, 라이덴, 하르렘, 그로닝겐에서 발생한 연간 파산
수)

 

 

 

 

 


위 그래프는 암스테르담에서 발생한, 연간 파산한 정도를 나타낸 것인데, 이는
1635년부터 1637년까지 암스테르담에서 그 수가 두배로 늘어났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단지 튤립을 재배한것만으로 파산자의 수가 이렇게 늘어나게
만들었다는것은 얼핏 상상하기 힘들지도 모릅니다. 결국 상당수의 "무모한 대중"이
있었다고 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을 겁니다....

 

..................

 

 

 

 


Tulipmania에 관해 지금까지 쓴 에피소드들이, 단지 튤립과 튤립가격의 움직임에
대해서만 얘기하고자 했던것이 아니듯, 현재까지 밝혀진 "튤립시장의 기본적인"
사례들이 투기버블의 발생을 설명하는것 또한 아니라는 점도 분명하게 알려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상당부분 튤립의 가격은 돈의 양이 팽창되고 투기와
과오투자에 대한 환경을 조성함에 따른 것으로, 정부정책의 최종결과의 징후로써 제공
되었을 뿐인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러한 버블과 투기는 세계 역사 전반에 걸쳐 무한히 반복되어져 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튤립버블과 같은 독특한 상황이 만들어진 이유가, 적어도
초기에는 정부정책의 현대적 수단인 부분준비금제도를 통한 화폐공급의 팽창은
아니었다는것은 분명하며, 오히려 그와는 반대의 현상으로 일어난 일이었다고 보는
이유 또한 어찌보면 굉장히 단순한 사실에 기인, 명확한 추론이 가능하기 때문에서
일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당시 유럽대륙의 모든 왕들은 화폐가 정화에의해 100% 보증되는 돈을
요구했는데, 이들의 욕망은 홀란드가 저질렀던 건전한 통화정책을 권력을 이용한
법령이나 돈을 쪼개거나 녹이는 방법에의해 그들의 통화가치를 떨어뜨리므로써
얻어지고 충족 될 수 있었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공해상에서 스페인
선박으로부터 동전과 금괴를 강탈하는 일이 일어난것과 결부된 정책었기 때문에,
전세계로부터 동전과 금, 그리고 은을 끌어들이게 만들어 이후 있을 버블의 단초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가장 중요한 원인이었기도 하구요.....

 


이로써 1630년대 암스테르담의 동전과 금, 그리고 은괴의 공급은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되었고, 자유주조법이 무분별하게 이루어지게 하므로써, 시장의 수요보다 더 많은
금과 은, 그리고 동전의 공급증가를 가능하게 만들었음을 일부나마 확인 해
보았습니다. 결국...가버나 킨들버거의 주장과는 달리, 화폐공급의 갑작스런(심각한)
증가가 이루어진것이 사실이며, 그로인해 발생된 투기와 과투자가 이제 본격적인
버블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 그 자체로 튤립거래를 강화하도록 만든
트리거가 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암스테르담 은행의 설립은 지금까지 적었던 17세기 초 튤립광풍으로 알려진
홀란드에서 일어난 버블뿐 아니라,

버블이 일어난 뒤, 물론 통화형태와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투기버블의 촉매제가 된
뱅크머니를 발행하므로써,

 


훗날 더욱 유명한 두개의 버블을 만들어 내게된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으며, 버블을
빛의 속도로 가속화 시킨 원인이 되었습니다.

 


열정적인 통화론자이자 케인지언이었던, 미시시피 버블의 주인공..

화려했던 존로Jhon Law의 삶과 그가 꿈꾸었던 이상...

 


다음 글에서는 역사가 그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부터 먼저 알아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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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arksw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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