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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th Sea 버블 - 17세기 영국의 재정중단 사건
a.17세기 영국의 재정중단 사건
17세기말 영국은 산업이 팽창되고 무역이 늘어나는 시기이자,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전쟁에 휩싸여 있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요소들이 결부되어 적어도 영국에서
만큼은 대중은행을 설립해야할 필요성을 갖게 됩니다.
마침 이무렵 홀란드와의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영국 정부가 암스테르담 은행이
네덜란드 경제에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물론 이것이 영국만의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1609년 암스테르담 은행이 설립된
이후, 유사한 다른 대중 은행들이 계속 세워지기 시작했는데, 1619년에만 네덜란드
남서부의 로테르담Rotterdam시와 델프Delft시, 미델븨르흐Middelburg시에
지역은행(local bank)이, 그리고 독일 함브르크에서는 the Bank of Hamburg이
설립되기도 했습니다. 물론 함브르크 증권거래소의 경우는 이미 1558년에 세워지기는
했습니다만…어쨌든 그 이후로도 은행의 인가는 계속되어 1656년에는 스웨덴에Bank of
Sweden이 설립되었습니다.
이처럼 유럽 전역에 다양한 상업은행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자, 영국의 상인들 역시
은행설립에 대한 여러가지 다양한 의견들을 표출해 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 담론이 상인들로 부터 제기된 것이긴 했지만, 상업은행의 탄생을 절실하게
필요로 했던 곳은 오히려 영국 정부 였습니다.
.......
잠깐 은행 얘기를 하기전에 먼저 17세기 유럽의 세금 얘기를 하고 가야할 것
같습니다. 뒤에 나올 세금문제를 떼놓고는 영국에서 발생 된 사우스버블을 정확히
이해하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먼저 네덜란드의 왕이었던 오렌지공(William of Orange)은 그가 1689년 왕위에 올랐을
때 오두막집을 제외한 소위 아궁이세를 없애므로써 대중의 지지를 얻게 되길
바랬습니다.
*(집안의 아궁이 하나당 2실링의 세금을 내도록 한 1662년 중세 영국의 조세제도.
아궁이가 많은 집에 사는 사람일수록 부유할 것이라는 생각에서 이런 세금이
도입되었을 것으로 추정. 그러나 사람들이 세금을 안 내려고 아예 아궁이를 없앰에
따라, 1688년 영국정부는 `아궁이세(hearth tax)`를 폐지)
그러나 프랑스를 상대로 한 전쟁에다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에서 시민전쟁까지
더해지게 되면서 막대한 돈이 필요해지게 되자, 윌리엄공은 세금을 아예 시리즈로
부과하기 시작합니다.
대략 살펴보기만 해도, 1381년 영국에서 이미 한차례 농민반란을 이끌었던
인두세(Poll Tax), 우표세, 창문세, 토지세에다 행상인세, 마부세, 신생아세,
독신자세, 결혼세 심지어 매장세까지…죽은 것 이거나 살아있는 것이거나 할 것 없이
거의 모든 것 에 세금을 부과 했습니다. 그냥 있는 대로 닥닥 긁어 모은 것입니다….
그러나 전례가 없는 이 말도 안 되는 세금을 부과하면서도 정부의 수입은 세수에
비례해서 증가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거둬 들이기는 했지만, 전쟁비용이
잠재적 세수를 훨씬 초과 했기 때문입니다.
사태가 나아질 기미가 없어 보이자, 의회는 정부의 세수를 담보로 채권을 발행 할 수
있도록 새로운 법 조항을 만들게 됩니다. 이 조항이 실시된 초기에는 주로
특수목적세에 대비해서 정부채권이 발행 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일반적인 세금에
대해서도 채권을 발행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채권들은 제3자에게 양도될
수 있었고 대부분이 골드스미스뱅커, 즉 금세공업자들이 보유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네덜란드의 상황이 저렇듯 전쟁으로 민중의 피를 빨아드리는기 전인, 1671년 12월,
영국의 챨스2세는 해군력을 증강하는 과정에서 자금이 급히 필요해지게 되자,
챨스2세는 만만한 뱅커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거절 당합니다. 결국 의회에서의
거친 논쟁이 끝난 뒤, 왕은 재정지출을 중지한다는 결정을 내리게 됩니다.
1672년 그가 발표한 1월 5일의 포고령이 바로 “재정중단사건Stop of the
Exchequer”이라고 알려진 영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채무불이행 사건 이었습니다.
왕이 원하는 특정한 어떤 사람이나 대상에게 지불할 수 있었던 권한이 중단된 것은,
말 그대로 돈을 빌려준 다른 사람들에게는 불행한 일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Keith
Horsefield는 이 때 발표된 포고령을 인용, 왕에게 허용된 두가지 항목의 재량권이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첫번째 항목은 “왕실의 친서나 옥새로 약속을 보증한 모든 지출” 같은 “정부지원
또는 대국민 서비스”가 그것이었고, 두번째 항목은 동결된 자금에 대해서도 왕이
곧바로 자금 집행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두번째 항목의 경우 그다지 이상하거나 놀랄일도 아닌 것이, 포고령이 내려진
이후에도 비용 청구는 정부로 계속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결정으로 영국
정부가 입은 가장 심각한 손실은 금세공업자들에 의해 정부의 권력이 흡수되었다는
것입니다.
영국 정부가 빚을 갚지 못하자 골드스미스 뱅커들은 빌려주기로 한 자금을 당연히
중단할 수 밖에 없었죠. 챨스2세가 이들에게 고객들이 맡긴 돈이라도 사용하게
해달라고 말했지만, 은행, 즉 골드스미스들 역시 그렇게 할 돈이 없었습니다.
영국의 재정중단은 처음에는 단 1년 동안만 한시적으로 중단하기로 한 것 이었으나,
결국 돈이 나올길도, 꿀 방법도 마땅히 없었기 때문에 1674년 1월까지 계속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재정중단이 경제 미친 영향 중 가장 직접적인 것은 신용이 증발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정부에서 시작된 상환 중단은 곧 도미노효과로 번져갔고, 그 즉시 골드스미스들이
가지고 있던 채권은 무용지물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이 후 수많은 골드스미스-뱅크가
문을 닫는 상황으로 치닫게 된 것입니다. 장기적으로는 주식시장과 금융시장의 결합을
10~15년동안 미루는 결과를 초래 했습니다.
재정중단 발표이후 챨스2세는 돈을 빌리기가 더욱 어려워 졌습니다. 따라서 영국
정부는 돈을 빌려줄 은행이 필요했고, 그 바램은 전도 유망했던 William
Paterson이라는 진보적 인간이 수 많은 사기(정부사업을 빙자한)를 계획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습니다.
John Giuseppi가 묘사한 페터슨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 시대를 수 십년은 앞선 사상을 가졌으며, 그에 따른 환상을 잠깐이나마
유지시켰던 사람 중 하나이지만, 그러나 천재적이지는 않았다…”
Paterson과 그의 재정적 후원자이자 대변인이었던 Michael Gogfrey는 국가
재무위원장을 지낸 이후 1619년 재무장관을 역임한 Charles Montague에게 영국은행에
대한 계획을 제출합니다. Michael Gogfrey는 정치인들과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영향력을 가진 당대 최고의 자산가였습니다.
이처럼 막강한 재력가가 제안한 계획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안건에 대한 승인은
의회내에서 치열한 논쟁을 불러왔습니다.
토리당원들은 국가가 은행을 관리하게되면 휘그당정부의 힘을 더욱 키워주게 될지도
모른다는 점 때문에 두려워했고, 반면 골드스미스들과 대출공여자들은 자신들을 찾는
사람들이 줄어들것을 두려워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일부 상인들은 그 은행이 자신들의 무역사업에 잠재적 위협이 될 것을
걱정했으며, 일부 휘그당 지지자들 조차도 영국은행The Bank of England이 의회의
재정적 독립성을 군주제로 변질 시킬것을 두려워 했습니다.
이 제안이 있기에 앞서 정부내에서는 가장 중요한 화폐발행이 갖는
정부사업(Scheme)에 대해 우려의 시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페터슨과 그의 지지자들은
골드스미스들이 국내에서 만끽하고 있던 대부 사업을 더욱 확대하는, 즉 화폐
발행으로부터 얻게될 엄청난 잠재적 이익에 대해 이미 깨닫고 있던 상태였다는 것을
막연하게나마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특히나 정부에서 국영은행에 대해서 비관적으로 바라보았던 이유는, 은행이 자국내
상업과 통화의 통제권에 대한 영향력을 잠식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의회는 페터슨이 내놓은 첫번째 제안을 거부했는데,1920년대 케임브리지의 경제사
전공 교수였던 존 클레팜(John Clapham)의 표현을 따르자면, “ 의회는 그의 제안서가
법정화페인 은행권을 발행할 것처럼 보였다고 생각했으며, 그렇게 하려고 했던 것은
명백..”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에 페터슨은 두번째 제안서를 신속하게 만들어 제출했는데, 그 법안에서 25항을
제외하고는 어음(은행권bills)에 대한 언급은 없었지만, 의회의 심사일정과는 별도로
나중에 법안 초안을 작성할때 슬쩍 추가 되고 맙니다.
그러니까...존 클레팜 교수의 표현 그대로입니다 ->”the clause looks like an
afterthought.”
페터슨의 계획은 내각에서도 오래동안 논쟁을 일으키게 됩니다만, 결국, 일반적인
금융법안인 것처럼 교묘하게 접근한 뒤, 마지막에 슬쩍 끼워 넣는식으로 법안 통과를
이루어 내게 돤 것이라고 합니다. 또 이 법은 영국은행법이라고 알려진 것은
아니었지만, John Clapham이 저술한 '영국은행의 역사'에서는 아래처럼 설명하고
있기도 합니다.
"...An Act for granting to their Majesties several Rates and Duties upon Tunnage
of Ships and Vessels, and upon Beer, Ale and other Liquors: for securing certain
Recompenses and Advantages, in the said Act mentioned, to such persons as shall
voluntarily advance the Sum of £1,500,000 towards carrying on the War against
France...."
프랑스와의 전쟁을 치루기 위해 왕에게 임의로 150만 파운드를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으며, 그 비용은 주로 선박과 주류등의 무게를 따져 몇가지 등급으로
나눈다음, 거기에 세금(관세)를 물려 조달한다...라는 내용입니다.
이런 이유로, 초기 영국은행은 "선박(용적)은행Tunnage Bank"이라고 불렸다고
합니다. 이 법은 1694년 4월 25일 국왕의 재가를 받은 뒤, 곧 150만 파운드중 120만
파운드의 사용 동의서를 제출합니다.
은행설립을 반대하는 의원들은 위원회의 소집을 연기하려고 했지만,
그러나 메리 여왕은 이들을 단번에 제압해 버리고 맙니다....
b.잉글랜드 은행의 설립과 화폐발행의 딜레마
윌리엄왕이 돈이 필요했던 이유는 단순합니다. 프랑스와의 전쟁때문이었죠. 은행이
설립되고 나서 자금을 신청한 예약자 명부가 6월 25일에 "Mercer’s Chappell"에서
공개됐는데, 첫날 정부에서 요구한 금액은 30만 파운드 였지만, 나머지 120만
파운드는 7월 20일 모두 처리 되었습니다. 맨처음 융자를 신청한 사람은 왕과
메리여왕이 10만 파운드 였고 이후 1,267명이 그 뒤를 이어 신청했는데, 신청자들은
그들의 신청금액중 25%를 선이자로 떼야 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놀라운 속도로 신청자가 채워졌기 때문에, 은행은 1695년 1월 1일부로 이
시스템을 완전히 가동하기로 약속했으나, 전체 대출 기금은 12월 중반에 사실상 이미
다 소진된 셈이었습니다. 클레팜교수는 이당시의 기금 집행이 "...그러나 신청된
120만 파운드중 60%인 72만 파운드만이 지불되었고, 그 마저도 기존 채권의 형태로
남아있던것을 현금처럼 계산했었다"고 설명합니다.
궁해진 영국은행은 돈을 계속 유지하는 수단으로 세가지 방법을 고안해 냈는데, 그
금융기법을 도입하자 마자 적극적으로 예금을 유치하기 시작합니다. 클레팜 교수의
설명입니다.
“…세가지 수단이란, 배서(보증)하도록 되어있는 지참인불持參人拂 어음”, “
입금하려는 계좌 중에서 한 장, 또는 한 권으로 되어 있는 것(일종의 통장)” 그리고
“책임져야 할 사람에게 주는 어음(예치증)이었는데, 그중 세번째 수단은 8월 달에
“돈을 실제로 받게될” 때까지 국내외에서 환어음으로 받아들여진 오직 “책임질 수
있는 어음”으로써 법적으로 판결, 정의된 일종의 예금증서였다.
두번째 수단은 현대식 통장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었는데, 어떤 개인이 어음을
발행하는 것이란 곧 당사자의 계좌로 돈이 입금되어야 하는 것을 말하며, 자신의
예금에 대한 영수증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규정하에 세가지가 혼합된 형태였었다.
마지막 첫 번째 수단은 지참인불持參人拂 어음이었는데, 이는 특정인을 권리자로
표시하는 것이 아닌 증권 소지인이 권리가 되는 형태로 소지인이 채무를 변제하도록
하는 어음이었기 때문에 은행은 영업을 거의 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 세가지 형태의 수단으로 인해 “책임질 수 있는 어음”의 소유자들에게 그
자신이나 또는 다른사람들에 대해 “어음발행”을 할 수 있게 된, 수표(Cheque)를
만들어내게 된 것이다….”
영국은행의 화폐발행 독점권은 자기자본을 초과하여 발행하는 것을 금지토록 한
이전의 법으로 제한 되어있었습니다. 그렇지만, 1696년 초부터 어음의 자유로운 사용,
그러니까 지나친 남용을 불평하는 비판이 제기 됩니다. 클레팜 교수는
1695년~96년까지 “The mint and Exchequer United”라는 제목하에
재주조(Recoinage)와 관련된 포스터에 나온 문구를 인용해서 이를 설명합니다.
“은행은 120만 파운드가 넘는 것에 대해 공적으로 어음을 발행할 수 없다는 의회법에
의해 제한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만일 독점권을 가진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이 발행한
어음을 좋은 용도로 쓰여지기 위해 자신들의 의무를 다했다면, 120만 파운드라는
금액이 아닌 관심만으로 은행 어음을 발행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직접
사용할 목적으로 자기앞 수표를 발행하여 (영구히 계속될 )총 금액에 대해 자금을
부담하지도 독점권을 가지지도 않은, 법을 넘어서는 신용을 갖게 될 것처럼 보였고,
어떤 기업들도 결코 실행한적이 없는, 거의 사기를 목적으로 한 어음을 발행했을
뿐이었다…”
의회, 상인, 골드스미스들의 수많은 공격에도 불구하고, 잉글랜드 은행은 계속해서
번성해 갔습니다. 설립초, 은행의 발기인들은 모든 휘그 당원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정부와 기업인들 모두에게 지지를 약속받았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그냥
지지가 아니라 은행이 위험에 처했을 때마다 도움을 주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하지만
영국은행이 성공적으로 지원을 받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 은행의 주가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는데, 1696년 1월 주당 108파운드라는 상상을 초월하는 폭등이 지지자들의
심리에 제대로 반영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곧 2가지의 위험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는데, 동전의 재주조, 그리고 토지은행 프로젝트가 그것이었습니다.
당시 영국의 동전은 하루가 멀다하고 가치가 떨어졌는데, 이유는 철이나 구리동전의
가치가 계속해서 은의 가치를 빠르게 잠식해 들어갔기 때문이었습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무역이 교착상태에 빠지고 또 그것이 너무 심했기 때문에, 의회에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민하던 끝에, 결국 1696년 화페 재주조법을 통과시키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 법은 금이나 은의 가치가 떨어지거나 그대로이거나, 명목가치 보다 높은 금액으로
어떠한 동전과도 판매및 교환을 금지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여기에는 이
외에도 은이나 금화를 조금이라도 깍아내다 적발된 사람들에게는 500파운드의 벌금을
부과하는 것 뿐아니라, 오른쪽 뺨에 범죄자임을 나타내는 낙인까지 찍는 형벌을
내린다는 내용도 포함 되어 있었습니다. 존로가 그랬던것처럼 역사는 다시 반복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만으로도 충분치 않았는지, 전문적인 금세공사(골드스미스)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에게 금괴의 판매를 금지합니다. 금괴를 숨기고 있다고 생각되는
집(골드스미스의 집)은 아무때고 들이닥쳐서 조사할 수 있었고, 그러다 만일 금이나
은이 발견되면, 그 덩어리들이 동전을 녹이거나 깍아서 만든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야 했습니다. 보안관청에서는 동전을 깍았다는 증거를 확실하게 증명해주는
사람들에게는 누구든지 40파운드의 상금을 주겠노라고 발표합니다.
주조법 자체가 밀고자들에게 더 많은 인센티브를 주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었다는 사실
때문에, 일명 “클리퍼Clipper”라고 불리던 금세공사들 중 그 법으로부터 안전을
확보하므로써, 다른 클리퍼들의 죄를 몰래 용서해주기도 했으며, 특히나 금세공사의
도제로 들어갔던 사람들의 경우 자신의 스승을 고발, 이들의 지위가 거의
노예수준이었기 때문에 그 대가로 자유민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이 “동전 깎아 내기와의 전쟁”은, 결과적으로 주조법에 대해 항의하던 성직자들을
사형에 처하는 등, 가혹한 처벌을 이끌내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두 가지 곤란한
점이 생겼습니다. 돈을 다시 만드는 것도 좋고 형벌을 가하는것도 좋지만, 정작
재무부에서는 동전을 재주조하는데 들어가는 비용과 동전의 가치를 옛날 기준으로
해야하는지 아니면 더 낮은 비율로 해야하는지에 대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딜레마에
빠져 버리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 들어가는 관리비용만2,073,164파운드 였는데, 그것을 전부 감당하기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최종 확정된 비용은 처음 시작할 때 예상했던 비용을 훨씬 초과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영국은행 역시 화폐를 다시 만드는 것에 대한 중요성을 너무
단순하게 생각했던 거지요…”잉글랜드 은행의 역사History of the Bank of England
1640?1903” 를 저술한 Andreades가 설명한 글입니다.
“…은행의 주식과 어음이 가치절하가 되어 배당금의 지불을 정지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면, 은행의 이사들은, 그들이 용기있고 지식으로 무장했음에도, 특히나
토지은행이 이미 위험에 처해져 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 같은 엄청난 모험에
들어가는 것을 피해야 했었다…”
새로운 동전을 옛날 기준으로 계속 유지할 것인지, 좀 더 가치를 낮춰서 발행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는 격렬한 논쟁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이에, 재무부 장관인
William Lowndes는 동전의 가치는 낮추는 한편 계속해서 이전과 같은 이름으로 부르게
하는것으로 재주조 비용을 충당하게될 아이디어를 개발해 냅니다. 그러나 Lowndes의
보고서는 존로크John Locke로부터 결정적인 반론을 당하게 됩니다. Andreades가
인용한 글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러한 강제적인 명령에도 불구하고 다른 것들과 비교해서 온스당
은의 가치는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인간의 힘으로는 이전에 단행된, 포고령이 발표
되자 마자 후추나 와인의 구매를 두배로 늘리게 한다던가, 또는 명목가치가 두배로
늘어나므로써, 은의 양이나 은화를 똑같이 두배로 만드는 등의 다른 상품 대비
화폐가치를 두배가 되게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어쨌든, 이전 재무장관인 몬테규의 지지를 받고 있던 Lownds현 재무장관의 제안이
상당히 우세한 견해였음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존로크의 날카로운 분석과 결부되어,
결국 옛날 기준을 보존하자는 쪽으로 의회의 의결을 이끌어내게 됩니다.
c. 토지은행과 영국은행, 그리고 남해주식회사의 탄생.
토지은행은 Dr. Hugh Chamberlain과 John Briscoe가 제안한 것입니다. 이들의 주장은
토지은행을 이용하면 잉글랜드 은행의 공공대출이 두배까지 늘어날 수 있다는
것이었고, 대출 이자는 토지자산을 담보로, 3.5%가 되어야 돈 빌려주기가 쉽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만 보아도, 앞선 존로의 미시시피 글을 읽어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챔버레인과 브리스코 역시 존로와 똑 같은 함정에 빠지게 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종이화폐를 토지가 보증한다는 얘기는 결국, 금이나 은이 화폐로써 가치가 더 나은
것이 아니라는 전제하에, 종이지폐와 토지의 가치가 동등하다는 결론이 나와야 한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Andreades는, 이 둘이 밀어붙인 일종의 사기라고 할 수 있는 자신들의
계획, 왜냐하면 이미 그 결과를 일부분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인데, 그 계획을
시행하기 위해서 정부의 강제적인 조치를 요구했다고 아래 글에서 지적합니다.
“…챔버레인과 브리스코는 대중들은 희귀금속을 더 선호하기 때문에, 그에 따라서
만일 토지은행이 자신들에게서 빌린 돈을 금으로 지불하도록 강제한다면, 그들은 곧
상환을 중지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들은 이 곤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음(채권)을 정화(금, 또는 은화)와 태환하지 못하게 강제하므로써
어려움을 극복하자는 제안을 했다…”
1696년 봄, 영국 정부는 다른 나라의 정부가 그렇듯, 다시 한번 돈이 필요게 되었고,
그래서 토지은행은 자신들이 발행하는 어음(은행권의 일종)을 수단으로 하여, 4월
27일 국왕의 재가를 받아 설립되게 됩니다.
은행이 설립되자마자 정부에게 지급된 어음의 발행 총액은 2,564,000파운드까지
늘어났는데, 정부는 여기에 들어가게될 대출이자를 소금세를 걷어 충당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토지은행은 급히 서둘러 태어난 만큼 빠르게 고사되어 갔습니다.
정부에서 갚아야 할 돈 가운데 왕이 내놓은 5천파운드까지 포함해서 고작
7,100파운드만이 마련된 것입니다. 영국정부는 순식간에 파산 상태가 되어버렸고,
재무부는 돈을 마련하는 대신 서둘러 재무부 어음을 발행하는 조치를 취합니다.
왕은 왕대로 네덜란드로부터 50만 파운드를 빌려 옵니다. 이처럼 왕이나 정부가
자금을 서둘러 마련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애초에 영국은행이 자기자본을
넘어서는 대출을 불가능하도록 만들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은행에서 발행한 어음은 10%까지 할인율이 떨어졌습니다. 게다가 주식은 토지은행의
설립이 통과되고 난 후 재무부 채권의 유동성마저 더해지자 주당 107파운드에서
83파운드까지 하락했습니다. 토지은행뿐 아니라 어음을 발행하는 사람들 전부가
은행의 경쟁자였던 셈이었습니다. South Sea Bubble의 저자인 John Caswell의 글
입니다.
“…재주조든 무역을 확대하는 것이든 종이화폐 없이는 재정을 마련할 수 없었고, 이
돈은 전쟁 기간중에 발행된 것으로 영국은행과 재무부에서 양적으로 늘린 결과이며,
롬바드 스트리트의 돈을 움직이는 수많은 골드스미스들 덕분이었기도 하다…”
잉글랜드 은행이 토지은행으로부터 받은 중요한 데미지 가운데 하나는, 독점권을 가진
정부가 화폐재주조 문제로 은행과 적대적인 관계에 있던 경쟁자들에게 도움을
구하도록 만든 것입니다. 즉 영국은행이 발행한 어음과 서로 경쟁하지 않도록
만들었어야 했는데, 오히려 어음의 발행을 늘렸을 뿐 아니라, 영국 은행권에 대한
불신과 신용의 축소까지 야기시켰다는 것이었습니다.
본래 1697년 입법된 화폐재주조법의 주요 조항은, 잉글랜드 은행에게 화폐발행의
독점적 지위를 준 것 입니다. 그런데 c와 d항에 저촉되는 행위를 한 것이었죠. 아래는
이 당시 제정된 영국은행법의 내용입니다.
(a) a. 은행은 자기 자본금에 1,001,171파운드를 앞으로 추가해야함,
(b) b.영국은행의 자원은 80%의 재무부 채권과 20%의 은행권으로 이루어 짐
(c) c. (b)항의 자원은 은행에서 통합 관리되어야 함.
(d) d. 다른 금융법인은 의회법에 의거 설립될 수 없으며,
1711년 8월 1일 까지 특허기간 동안 독점적 지위를 부여 받게 될 것임.
(e) e. 8%의 금리 상환은 비용은 소금세로 보증하였음.
(f) f. 자본의 추가를 위한 자원(재무부 채권 및 은행권)을 실행하기 전에,
가지고 있던 자본은 각 독점 사업주들에게 100% 지불을 끝내야 함.
(g) g. 은행은 요구하는 즉시 지불할 수 있다는 조건하에(요구불예금)
배정된(예약된) 총액을 더한,
원래의 자본 금액(120만 파운드)에서 은행권을 발행할 권리가 있음.
(h) h. 은행의 모든 자산에 대해서는 세금이 면제 됨.
(i) i .은행권을 위/변조하는 것은 중죄로 다스리게 될 것.
이 법을 시행하고 난 결과, 유통과정에서 은행권 20만 파운드를 포함 총 80만
파운드가 빠져나갔고, 따라서 남아있는 은행권에 대한 할인은 사라지게 되었으며,
정상적인 유통이 이루어 질 수 있었던 까닭에, 영국은행의 입장에서는 토지은행때문에
발생된 손실이 상당히 컸었던 셈입니다.
영국과 프랑스와의 전쟁이 1697년 9월 끝난 뒤, 전쟁 비용의 부담을 정부 재원에서
겨우 지원할 수 있게 된 것처럼 보였으나, 1697년 초, 정부가 빌린 단기 자금만 5백만
파운드를 넘어서므로써 왕실을 상당히 어렵게 만듭니다. 이는 그해 4월에 투자하기로
했던 “The Malt Lottery Loan”이 완전히 실패하므로써 곤란을 가중시키고
확대시켰기 때문이었습니다.
Malt Lottery는 재무부가 돈처럼 사용할 수 있도록 10파운드 짜리 티켓 14만장을
발행한 것으로, 총 140만 파운드라는 금액까지 늘려 놓았지만, 실제 팔린 것은
1,763장이 전부 였습니다. 이 때문에 실추된 정부의 신용은 1년뒤에 가서야
신동인도주식회사의 부동주가 성공적으로 유통되고, 3년간 평화가 유지 된데다가,
여기에 잉글랜드은행의 도움이 더해져 겨우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2백만
파운드의 재무부 국채 갚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형태로 태어난 잉글랜드
은행은, “신용기금”으로써 정부의 부채를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안정적인 평화 상태는 오래 가지 않고 끝납니다. 1701년 2월, 프랑스의
루이 14세가 스페인령의 네덜란드를 침입, 스페인과의 전쟁이 시작 되었기
때문입니다. 루이14세를 극도로 싫어했던 윌리엄은 유럽연합을 결성하기위해
노력했지만, 그러나 이 ‘윌리엄왕의 전쟁King William’s War’과 그로인해
상업적으로 불안이 계속되는 것을 민중들은 바라지 않았습니다.
3년간의 평화에도 불구하고, 세금과 이자율은 계속 높아졌고, 이전 전쟁으로 인한
빚은 줄어들지 않은채 계속 남아 정부와 국민의 부담을 가중 시키고 있었으며,
거기에다 윌리엄 왕이 죽고 스페인군이 영국해협을 건너자 영국은 다시 한번 극심한
공포에 휩싸이게 됩니다…
민중의 피를 흩뿌리는 전쟁이 장기화되자 돈에 쪼들린 영국은 다시 한번 세금에 손을
댑니다. 잉글랜드 은행은 단기자금은 자체적으로 지원했으나 장기자금의 지원은
96년에서 99년까지, 3년 동안의 연금을 팔아 지원합니다.
1702년 앤여왕으로부터 재무상에 임명된 시드니 고돌핀(Sidney Godolphin)은 “세심한
주의와 기술로 국가재정을 관리”해야 한다는 딕슨(Dikson)의 주장을 신봉하던
인물이었습니다. 그 당시 고돌핀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영국군대의 승리를 빌어
상대적으로 쉽게 재원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니까 전쟁의 승리가
영국에대한 투자자들의 신뢰를 강화시켰던 덕이었지요.
하지만, 전쟁비용은 해마다 8억파운드에서 9억파운드로 점점 증가되어 갔습니다.
이처럼 예상치 못했던 전쟁비용 때문에 국가는 세금을 새로이 신설, 국민들의 고통을
배가 시킵니다. 따라서, 이렇게 걷어진 세수는 18세기가 끝날 때 까지 정부의
장기부채를 갚기 위한 담보물로 사용 되고 맙니다. 1704년부터 1710년 동안,
영국정부의 총 장기부채는 1천4십만 파운드에 이르게 됩니다. 여기에다 고돌핀은
영국은행에서 재무부 채권과 동인도회사에서 추가로 170만 파운드를 얻습니다.
이 당시, 영국 민중은 전쟁의 장기화와 거기에 들어가는 비용, 즉 민중의 피와
전쟁하느라 빌린 돈때문에 시름이 점점 깊어가고 있었습니다. 거기에다 1708년과
9년의 겨울은 정말 가혹했습니다.곡물의 수확은 사상 최악이었고 따라서 농산물의
가격은 가파르게 치솟았습니다.
인플레이션과 8월달에 열린 헤이그 평화회담이 실패로 돌아가자, 다음 달 9월
말프라트전투(battle of Malplaquet)가 벌어지고, 정치적 분위기가 급 반전하자 그
다음해에는 신임 토리당 당수 선출 압박으로까지 이어져 영국의 정치는 불안정한
시기가 계속됩니다. 1720년 8월 8일, South Sea 주식회사의 설립자이자 신임 당수인
로버트 할리(Robert Harley)가 고돌핀을 이기고, 이틀 뒤 재무부 장관으로 임명,
다음해 5월에는 결국 재무상으로 임명 됩니다.
그러는동안, 존 블런트경Sir John Blunt과 그의 파트너들이 Sword Blade Company를
보다 발전된 형태의 금융회사로 차근차근 변신시키고 있었는데, The South Bubble의
저자인 카스웰Carswell은 그의 책에서, 정치와 금융을 하나로 통합하는 거대한 제국이
잉글랜드 은행을 이용하므로써 얻어질 수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원래 Sword Blade Company가 하던 사업은 정부의 부채 상환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주식을 발행하는 과정에서 자산을 획득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채권은 군의 경리부에서
발행한 무담보 회사채(Army Debentures)의 일종이었다고 합니다. 군대에서 발행한
채권의 시장가격은 85파운드였고, 이 채권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100파운드
상당의 Sword Blade Company의 주식을 제공했습니다. 정부는 그들이 가지고 있던 빚을
오히려 수단으로 삼아 할인된 가격으로 거래를 합니다.
1704년 봄, 잉글랜드 은행은 Sword Blade Company의 활동에 제재를 가하고, 재무성에
블런트와 그의 회사가 1697에 제정된 독점권 조항을 위배하고 있다는 주의를
보냅니다. 블런트는 1697년의 법은 오직 의회법에 의해 지정된 경쟁 기업들에 대해
금지한 것일 뿐이고, Sword Blade Company는 거기에 해당사항이 없다고 주장을
합니다. 1707년 5월, 영국은행은 은행의 우선권을 강화하는 것과 Sword Blade
Company대해 조치를 취하겠다는 약속을 재무부로부터 얻어낼 수 있었습니다.
재무부가 보기엔 Sword Blade Company가 잉글랜드 은행의 건강하고 좋은 경쟁자이자
자금줄이긴 했지만, 그보다 훨씬 더많은 돈이 절실하게 필요한 상태였기 때문에
잉글랜드은행의 조건을 수용, 은행은 4.5%의 이율로 150만 파운드를 재무부에게
빌려주기로 합니다.
재무부는 대출받은 댓가로, 이어서 1711년이었던 은행의 특허를 1732년으로 연장시켜
주었고, 당시 2,201,171파운드였던 은행의 자기 자본을 두배까지 늘려달라는 요구를
허용합니다. 허가가 되자마자 그날 정오가 되기도 전에 늘어난 자본금은 그 즉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안드레아즈는 그 당시 은행의 자본 상태가 사실상
파괴 되었다고 보았는데, 즉 자기자본을 넘어서는 신용 남발 상태의 단계로 넘어가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아래는 그것을 정리한 표입니다.
본래 은행의 자기자본 ………………………………………….2,201,171 파운드
늘어난 자본의 합 ……………………………………………….4,402,343 파운드
당시 진행되었던 대출액 40만파운드까지의 합……………...4,802,343 파운드(3)
기존에 발행되었던 재무부 채권……………………………….1,775,027 파운드(4)
-------------------------------------------------------------
합계(3)+(4)
6,577,370파운드 30센트
처음에는 Sword Blade Company와 동인도회사와 함께 잉글랜드 은행의 활동은 사용할
수 있는 돈이 풍부해짐에 따라 안정적으로 되었습니다. 카스웰의 글에서 처럼,
“…전쟁은 종이화폐의 통화승수 효과로 인해 부를 촉진 시키고, 감독을 받지
않았으며, 오히려 장려하도록 만들었다. 10만 파운드를 만드는 것쯤은 이제 희귀한
일…”이 아닌게 된 것입니다.
잉글랜드 은행의 특허권이었던 은행권의 발행은 오직 자본의 총액에 제한 될
뿐이었습니다. 즉 총액이 늘어나는 한 신용은 무한대로 커질 수 있었다는 의미에 다름
아니었기 때문에 H.D. Macleod같은 사람은 이 것이 곧 국가 주도의 사기나 다름없는
것이라며 신랄한 비판을 거두지 않았다고 안드레아즈는 말합니다.
“이제, 어느정도는, 이 계획이 나쁜 결과를 가져 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계획은 그 자체가 원칙적으로 완전히 부도덕한 것이었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다.
이는 존로가 저질렀던 화폐이론의 경우처럼 야만적이며 불합리한 사기에 다름
아니었기 때문이다.
토지에 기대어 종이화폐를 근간으로 한 그의 사기는 불합리성과 비교할 때 분별력은
오히려 냉정했다. 만일 정부의 모든 부채를 똑 같은 양의 지폐로 만들어 낼 수
있다면, 그야 물론, 여기 있는 우리는 그 즉시 ‘철학자의 돌”을 가진 것이나
다름없게 될 것이다. 이제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그 많은 사람들이 엘도라도라는
황금의 땅을 찾아내야할 필요가 더 이상 없게 된 것이며.…사람들은 황금덩어리
조차도 가볍게 집어들 수 있게 되길 바랬던 것이다....”
비판도 비판이지만 맥클레오드가 한 말은 희귀재, 혹은 자본재가 있다 하더라도
사람들은 그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한다는 얘기일겁니다. 화폐로써의 본질적인 속성 중
하나인 휴대성은, 그래서 무한히 많은 다양한 종류의 재질과 방법으로 파생시키고
더해지게 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테지요. 따라서 현대적 관점의 금융이론가들의
입장에 본다면, 돈이란 반드시 화폐의 형태로 존재할 필요는 없었을 겁니다….
어쨌든, 새로운 재무부 장관이 된 로버트 할리(Robert Harley)는 고돌핀으로부터
막대한 빚을 그대로 물려 받았기 때문에 특히, 해군을 증강하는데 필요한 돈을 빌려준
채권자들을 어떤 식으로든 안심 시켜야 할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들이
정부로부터 돈을 받을 수 있을런지에 대해 매우 회의적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할리 재무부장관은 이 무렵, Sword Blade컴퍼니의 조지 카스웰과 존 블러트, 그리고
해군과 큰 계약을 맺고 있던 앰브로스 크롤리 경(sir Ambrose Crowley)으로부터
하나의 제안서를 받게 됩니다. 블런트와 카스웰이 제안한 계획의 핵심은 해군과
채권자들이 모여 회사를 만들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국가의 부채를 주식으로
바꾸자는 것이었지요.
할리장관으로써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부채는 줄어들 기미가 없는데다 갚을 돈은 없고,
또 이들의 제안을 대체할 만한 다른 수단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1711년 6월 12일…이들의 제안은 왕의 재가를 받게 됩니다.
정부의 단기채권중 거의 9백만 파운드를 갖고 있었던 채권자들은
“정부관리와 영국 무역 상인 주식회사”라는 왕실의 옥새가 찍힌 회사를 설립합니다.
표면상의 설립 목적은 영국의 남해(South Sea)와 미국의 일부 해안에서
어장을 적극 장려하기 위한다는 것이 었습니다.
d. 남해주식회사의 독점권과 전환사채
...9백만 파운드라는 정부부채를 상각하기 위해 세워진 이 회사는, 오리노코
강에서부터 티에라 델 푸에고에 이르는 동부연안과 서부연안 전체를 아우르는
남미에서의 무역 독점권을 갖게 된 완전한 자주 독립체 였습니다. 이 지역은 얼마동안
영국의 부자들에게 제법 매력적인 곳으로 받아들여 집니다. 따라서 정부의 채권자들을
안심시키는 완벽한 수단이자 높은 잠재적 수익을 주게 될 곳으로 여겨졌지요.
이 당시 엘리자베스 여왕이 통치한 이래 영국은 무력으로든 아니면 법적 권리에
의해서든, 미국에 근거지를 둔 스페인을 몰아내기 위해 계속 공격을 시도했습니다. 이
공격은 다른 전쟁과 마찬가지로 영국의 실패로 끝납니다. 실제로 이 곳의 시장이
개방된 것은 훨씬 훗날인, 스페인 식민지로써 정치적 독립이 이루어졌던19세기 때
였습니다. 그러니 애시당초 사업의 성공은 염두에 두지 않은 채 만들어진, 빚 갚는게
목적의 전부였던 회사였다는 것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남해주식회사의 설립은 서인도를 장악하고 있던 스페인을 영국과 네덜란드가 협공으로
공격할 계획을 짜고 있던 퀘백에 대해 1711년 8월, 영국이 원정대를 보낸 시점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딕슨이 쓴 ‘영국에서의 금융혁명”이라는 그의 이론에 따르면 이
공격의 목적은, “할리의 평화협상을 지원하기 위해 의도한 것으로, 비록 거의 허풍에
불과하다는 의구심이 들기는 하지만, 신세계에서 제국간의 나눠먹기를 하기 위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는 설명이 역사의 결과로 따지자면 틀린 주장이 아니기
때문입니다.즉 남해주식회사를 위한 전쟁이었고 평화협상 이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1713년에 끝난 이 전쟁에서 남해주식회사가 갖고 있던 무역상의 권리를 다시
한번 규정하게 됩니다. 그게 뭐냐 하면, 남해주식회사에게는 스페인의 카르타헤나,
또는 멕시코의 베라크루즈에 년간 500톤의 무역선박과 공장에 150톤의 식량을 공급을
허용해 주기로 했는데, 이는 멕시코, 파나마 북부의 중앙 아메리카, 스페인 령의
서인도, 미국의 남서부와 필리핀으로 이루어진 뉴스페인으로 30년간 아프리카
노예들을 공급하기로 계약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 계약서에는 연간 4,800명의 노예를 보낼것을 구체적으로 명시해 놓았다고
합니다. 이런 말도 안되는 독점권을 주는 대신 스페인의 왕은 노예거래로 인한 수익
중 10%와, 다른 무역으로 인해 얻은 것 중 28%의 리베이트를 받기로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스페인 왕에게 주기로 한 지분에 따라 이 특혜는 상당히 제한적이었으며,
따라서 회사로 들어온 수익은 기대고 말고 할 것도 없는 초라한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결국은 서두른만큼 그 혜택은 오히려 스페인으로 간 것입니다. 늘 그렇듯
조바심은 이익보다는 손실을 더 많이 가져 오는 법이니까요…
그러나, 남해주식회사의 주식은 투자자들이 2년 동안에 걸쳐 매도 하므로써 정부에게
빌려준 돈의 회수를 마무리 짓습니다. South Sea법의 제정 당시9,471,324파운드가
되리라고 예상했던 금액에 조금 못 미치는 9,177,968파운드로 돈이 늘어나면서 사실상
정부와의 채무관계는 종결된 셈이었습니다.
생각해보면 무일푼으로 만든 회사에게 정부가 전쟁까지 일으키며 독점권이란는 특혜를
주고 그로 인해 2년여에 걸쳐 당시 9백만 파운드라는 엄청난 빚을 갚을 수 있게
만들었다는 것은 참으로 괴기하기 짝이 없는 일이나 다름 없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더라도 정부가 기업과 손을 잡고 놀아나기 시작하면 어떤 결과를
초래하게 될지는 그다지 대단한 상상력이 필요하지는 않을 겁니다. 희생은 역시
아무것도 모르는 다수의 서민들이 될 테구요... 왜냐하면, 전혀 예상치 않았던 늘어난
화폐의 양 만큼의 무게를 시장은 떠 받쳐야만 하기 때문입니다.그런데 거기에
더해서…머지않은 미래에 빚은 재산을 불릴 수단으로써까지 발전하게 됩니다.
아래에도 나와있듯, 일종의 전환사채와 교환사채가 짬뽕이 되었다고도 볼 수 있겠죠…
투자자들이 정부의 빚을 회수해 가는 동안 남해주식회사는 정부로부터 8천파운드의
관리비용과 550,678파운드의 이자를 받아 갔습니다. 처음에는 이자조차 버거워했던
정부가 채무의 부담으로부터 조금씩 벗어나게 되면서 빠르게 이자와 관리비용을
갚아나가자, 상황은 바뀌게 됩니다. 6개월이나 연체되었던 이자를 빚을 청산
하면서1715년 여름에 다 털어버린 것입니다.
이로 인해 이자 수익도 더 이상 기대할 수도 없게 되었고, 스페인과 미국에서의 무역
역시 별다른 진전을 보지 못하게 되자, 남해 주식회사가 가지고 있던 금융상의 문제가
빠르게 수면위로 드러나고 맙니다. 1712년, 13년, 14년에 이 기업의 소유자들은
채권이나 현금으로 배당을 받는 옵션을 받았습니다만, 그 다음해인 1715년에는
채권으로 배당을 받는 것 외에는 선택권이 없게 됩니다. 그러다 그 다음해에는 배당을
주식의 형태로만 받을 수 있게 됩니다. 그나마 투자자들에게 다행스러웠던 점은
액면가 그대로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1712년부터 1715년 동안 정부는 남해주식회사의 주식을 빚을 갚고 대출을 받기 위한
담보용으로 썼습니다. 말로는 그랬습니다. 국민을 위한 것이었다고. 정부는 이렇게
불려서 만든 2,371,402파운드였던 남해주식회사의 자본에다 50만 파운드의 주식을
따로 비축해 놓습니다.
하지만 이 기금의 사용은 민중을 위한 것이 아니었고, 결과적으로 1717년에, 정부의
결산 시, 미래에 부족분을 지불할 수 있는 일반 기금외의 용도로 사용할 수 있도록
의회가 선포되므로써 그 자체로 빚 부담을 떨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 이 무렵
무역전선에는 암울한 그림자가 더욱 짙어져 전반적인 상황을 더욱 어렵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남해주식회사가 사용한 수단으로 인해, 정부는 유동성 부채를 단번에 해결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지만 1711년 당시 전쟁비용은 최고치에 달해 있었고, 그 부담을 덜어줄
상환자금은 한 푼도 없던 상황 이었습니다.
이 부족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할리 장관은 단기 자금 운용에 필요한 엄청난
규모의 재무부 채권을 발행하고, 세수부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1711년과1712년에
걸쳐 잉글랜드 은행을 이용하여 920만 파운드의 복권대출을 받습니다. 할리 장관은 그
후에도 2년동안 계속해서 소규모의 복권대출을 받아 갔습니다. 이렇게 받은 대출 중
어떤 것은 연간 왕실에서 사용하는 비용을 갚는데 사용되기도 하고 일부는 공공
서비스 비용으로 지출되기도 했습니다.
계속되던 스페인 전쟁은 마침내 1713년 끝이 납니다. 영국과 다른 참가국들은 이
전쟁으로 인해 도무지 해결 방법을 찾아 내기 힘들 정도의 엄청난 부채를 만들어
냈습니다. 자신들의 이익을 주장하는 만큼의 빚이 생겨난 것 입니다.
1714년 9월 29일, 영국의 국가 부채는 무려 40,357,011파운드를 기록합니다. 거기에다
450만 파운드에 달하는 국채가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고, 알려지지 않은 해외
지원금과 군사비 상환 금액은 얼마인지 언급 조차 안되어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이쯤
되다 보니 영국 정부는 이자부담을 조금이라도 줄여보고자, 엄청난 규모의 채무
구조조정에 착수할 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이 구조조정은 세가지 법의 전환을 통해 달성할 수 있었습니다.
첫째는 복권 대출과 은행의 연금 대출로 발생한 부채를 영국은행에서 관리하고 있던
5%의 주식으로 전환 하는 것.
두 번째 조치는 남해주식회사와 영국은행에게 진 부채에 대한 이자율을 줄이는 것.
세 번째로는 국가 부채를 줄이기 위해 감채기금을 만들고, 국채의 이율을 1.5%로 낮춘
것입니다.
1715~1719년 사이 실시된 이 조치들은 대부분 성공합니다. 특히 정부의 연간 이자
부담율을 13%나 줄였기 때문에 국가 신인도에도 상당히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습니다.
비록 국채 수익율이 하락했음에도 채권 보유자들은 그들의 원금이 오히려 안정화
되었음을 반기기까지 했으니까요. 이러한 심리는 정부주식의 시장가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는데, 1717년 말, 남해주식회사의 주식이 액면가치보다 4포인트나 높게
거래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금융상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연금대출로 인한
이자 지급문제였는데 연금의 속성상 높은 이자를 거의 영구히 지불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연금보유자들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연금을 조금이라도 건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은행이 그랬듯, 주식으로 바꿔야만 했습니다.
재무부는 정부의 계획에 따라 채무를 1719년 남해주식회사로 넘깁니다. 연금대출로
발생된 이자비용은 연간 13만 파운드에 달했기 때문에, 재무부는 11년6개월 동안의
시장구매가에서 1,552,500파운드에 이르는 이자를 새롭게 자본화 해야만 했습니다.
이 계획안에 따라 이자는 168,750파운드를 돌려 받고, 대신 재무부에는
778,750파운드를 빌려주게 됩니다. 따라서 정부의 다양한 부채조정으로 인해 재조정된
국가부채는 4천만 파운드가 넘었던 것이 고작 230만 파운드 정도로 확 줄어들게 할 수
있다라는 계산이 나온다고 합니다. 하지만, 정확하게 계산된 수치는 찾지 못한 관계로
구체적으로 어디서 어디를 얼마만큼 줄인건지는 저 역시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엄청난 금액의 부채를 실제로 청산시켰다는 것 만은 분명합니다.
1719년 봄까지 투자자들 가운데 2/3만이 이 계획을 받아들여진 것으로 밝혀 졌지만,
어쨌든 남해주식회사의 자본은 이 같은 과정을 거쳐 174만 파운드에서 총
11,746,844파은드로 거의 10배 가량이 늘어나게 됩니다. 정부가 마련한 기금은 총
5섯번에 걸쳐 남해주식회사로 592,000파운드를 집행, 그 해 12월 완료됩니다. 이중
544,142파운드는 재무부가 비용을 지불한 것입니다. 남해주식회사는 이 돈으로 다음해
7월 주당 114파운드, 총 52만 파운드어치의 신주를 발행합니다. 이제 남해주식회사는
정부에게 193,582파운드의 권리를 주장합니다. 따라서, 이 모든게 완료 되었을때,
회사를 운용하면서는 24만 파운드를, 갖고 있던 주식으로부터는 24,000파운드라는
만족스러운 수익을 얻게 됩니다. 이 같은 성공적인 구조조정을 바탕으로 그
다음해에는 이 보다 훨씬 큰 수익을 얻게 됩니다.
영국에서 남해주식회사가 승승장구하고 있었을때, 바다건너 프랑스에서는 존로의
시스템역시 정점에 달해 있었고 남해주식회사는 자신들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맹렬한
질투심에 불타오르고 있었습니다. 존로식 부채 전환 방법이 이미 블런트와 그의 회사
동료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었음에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영국정부는 좀 달랐습니다. 존로의 성공에 가려져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파리에서 일어나고 있는 자본의 유출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정부에서 계획하고 있던 것 은 더욱 더 많은 부채를 전환하는 것이었지 그 계획을
방해하는 자본의 유출이 일어나는 것 을 고려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우려는 곧 공포로 바뀌기 시작했는데, 존로가 영국정부의 주가를 내려
누를 거대한 베어마켓을 계획하고 있다는 소문이 들려왔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소문과 함께 영국정부의 심장을 두들기는 또 다른 루머가 들려왔습니다. 존로가
동인도회사와 남해주식회사를 사들이고 진정한 유럽의 금융황제가 될 것이라는
것이었죠.
그러나 결과론적이긴 하지만, 영국정부는 완전히 잘못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앞의
글을 보신 분들은 벌써 짐작하고 계시겠지만 존로의 시스템은 이제 막 붕괴되고 있는
단계에 와 있었기 때문입니다.
위에서도 지속적으로 언급되고 있지만, 당시 영국정부에게는 골치 아픈 두 가지의
부채가 있었습니다. 먼저 96년짜리와 99년짜리 연금이 문제였다고 하는데, 특히 이
연금은 이자가 가장 비쌌을 때 팔은데다가 그렇게 마련한 감채기금에서 끌어다 쓴
자금을 다시 채워 넣어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럴 돈은 없었죠. 연금받을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정부의 입장을 이해했다면
얘기는 달라질 수 있었겠지만...그런일은 당연히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또 다른
부채는...그냥 잡다한 빚이었습니다. 이 빚은 감채기금에서 갖다 쓴 것인데, 연간
75만 파운드 가량 되었고, 정부의 총 부채는 관리비용을 포함하지 않은 상태에서 연간
150만 파운드가 넘었다고 합니다. 카스웰의 글입니다.
"...재무부의 협상가들은 남해주식회사에게 상환할 수 있는 거대한 단일 연금처럼
위장되기를 바랬다.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이 금액이 총자산의 합계로
나타내야 할 필요가 있었으며...남해주식회사의 재정을 미궁으로 밀어 넣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자본을 나타내는 수치가 단지 지폐의 유통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하는 것 이 중요했다...."
'상환할 수 있는 부채의 자본화'할 금액은 대략 1,600만 파운드로, 은밀하게
조직적으로 움직인 시스템상으로 보면, 그렇게 어려운 것 은 아니었습니다. 어차피
상환할 수 없는 연금이었고, 따라서 이 부채를 자본화하는것을 공식적으로 진행한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무엇이든 비공개적으로 숨어서 하는 일은
상대적으로 수월한 법이니까요….
이 계획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가능한 부채 비용을 줄이는 것이었습니다. 연금을
담보로 부채를 자본화하려는 목적은 달성했지만, 발행된 채권의 상환날짜에 대한
언급은 없었습니다. 99년과 96년짜리 연금은 20년, 32년간 이율을 5%로, 복권연금은
40년간 6%로 이자율을 제한했습니다. 이 시스템을 이용하여 연금으로 자본화한 총
금액은 1,500만 파운드 였고, 최대 3,100만파운드까지 늘릴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3,100만파운드라는 경이적인 금액을 채권자들은 그 금액만큼
자발적으로 남해주식회사의 주식으로 교환해 갑니다. 이 회사의 주식은 어떤 부채이건
간에 시장에서 결정된 것이라면 필요할 경우 얼마든지 발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1719년의 경우처럼, 주가는 더욱 오르고, 채권을 주식으로 전환하므로써
남해주식회사가 얻게 된 이윤은 생산물의 결과가 아닌 주가조작에 의해 더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기까지 부채를 전환하는 방법을 정부와 협상하는 과정에서 남해 주식회사는
연간 파운드당 얼마를 받느냐를 두고 상당히 치밀하게 준비했었다고 합니다. 물론
정부 역시 얼마를 지불해야 하느냐를 두고 승강이를 벌였던 것 같습니다.
남해주식회사는 영국정부로부터 1년에 1파운드를 요구했기 때문이죠.
그러나 불환지폐에 대해서는 예외였습니다. 파운드당 14실링이 전부였죠. 이로써
재무부는 4%의 이자만을 지급하게 되었으며, 결국 연간 40,000파운드라는 금액을
절약할 수 있게 됩니다. 그 뿐 아니라 7년 뒤에는 모든 빚을 청산하고 저축도 가능해
지는 것 이었습니다. 이것은 감채기금에서 끌어다 쓴 원금을25년간 갚아나갈 경우
세이브시키게 될 이자를 두고 계산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만약 이런 계산에 문제가 생길 경우 남해주식회사는 그것을 보완할 인센티브를
주기로 합니다.1716년 이전에 발생된 채무에 대해서 그 빚을 갚을 수 있도록 300만
파운드의 자금을 1년에 네번, 4분기에 걸쳐 재무부에 주기로 한 것입니다. 여기서
빚을 갚고 남은 돈을 어떻게 사용하든 상관하지 않겠다는 내용도 포함됩니다.
결국, 정부는 가지고 있던 부채를 모조리 주식으로 바꿔 가도록 민중에게 강제하고,
채권자들은 주가로 돈을 벌 수 있는, 오직 이 두 집단만이 만족할 수 있는 합의를 한
셈이었습니다.
e.남해주식회사의 승리, 그리고 새로운 버블의 시작
앞의 글에서처럼 재무부에게 주기로 한 이 300만 파운드의 뇌물은 블런트에게는
일종의 보험정책이었습니다. 만약 이 모든것들이 한방에 해결될 수 있는 "부채전환"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이 300만파운드로 그 빚을 대신 갚을 수 있게 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당시 대부분의 채권을 가지고 있던 잉글랜드 은행으로써는 이 상황이
위협적인 상황이 될수밖에 없었는데, 남해주식회사의 주식을 보유하는 형태로 부채의
성격이 바뀌게 되어 은행으로 현금이 들어오지 않으면 이를 재투자하므로써 얻게될
수익이 사라져버리는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블런트는 정상적인 은행활동으로는 300만파운드라는 돈을 벌 수 없으리라는것을 잘
알고 있었고, 부채가 주식으로 전환될 경우, 자신의 회사에서 벌어들인 수익 중
1페니당 5%의 배당금을 은행에 지불해야만 할 것이란 것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런것을 계산기로 두들겨 본다음 블런트가 내린 결론은 자신들에게 필요한 자금을
만들기 위해서는 남해주식회사의 주가를 무조건 올려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블런트는 이를 정확하게 계산했습니다. 만일 주가를 오르게 할 수 있다면, 정부가
담보로 잡힌 연금 소유자들은 이 채권을 주식으로 빠르게 교환하므로써, 그 보다 더
신속하게, 엄청난 자산상의 이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내생적, 그러니까 시장 내 자연발생적으로 붐이
일어나도록 계획하는 것 뿐이었습니다. 카스웰 역시 그렇게 말합니다.
“…그 계획은 시장에 이미 진행되고 있던 주가 급등에다, 바로 전년도에 일으킨
금액의 10배인 5백만 파운드라는 새로운 돈을 저리의 이자와 동시에 유입시키고자 한
것이었다…”
1719년의 마지막 날, 이 계획은 차질없이 진행되어 남해주식회사의 주식은 말 그대로
급격한 부를 만들어내며 한 해를 마감합니다. 그 후, 스페인과 영국은 종전을
선언하고 남아메리카에서의 무역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 무렵 재무장관이었던 존
아이스래비John Aislabie는 곧 남해주식회사가 진행하게 될 연금증서를 포함한 거의
모든 국채를 주식으로 전환하겠다는 블런트식 그랜드 플랜을 하원에 제안합니다.
제임스 크래그 대신은 그 제안을 따르기로 합니다. 그러나 앵글로-아이리쉬
계열이었던 휘그당의 토마스 브로드릭이 다른 의원들과 공무원들이 그 제안을
검토하기 전에는 투표하지 않겠다고 하자 아이스래비는 그의 영향력에 당황하게
됩니다. 그래서 일단 잉글랜드은행에게 반대되는 제안서를 만들 시간을 줍니다.
그런데 잉글랜드 입장에서는 오랜시간동안 최고의 금융지위를 누리고 있던 자신들의
위치가 갑작스럽게 위협받게 되어 버린것입니다.
남해주식회사는 10여년동안 정부로부터 받을 연금의 액수를 천천히 늘려 50만
파운드를 넘어서게 되었지만, 이제는 잉글랜드 은행이 그 돈을 정부대신
남해주식회사에 줘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그것도 200만 파운드가 넘는
연금액이었습니다. 잉글랜드 은행으로서는 런던 금융시장내 독보적이었던 지위를
빼앗기고, 남해 주식회사의 그늘에서 신용이나 만들어내는 오랜 경쟁상대였던
SB컴패니와 함께 평범한 상업은행으로 격하되는것을 무엇보다 두려워해야 하는 입장이
되버린 것입니다.
어쨌든 블런트식 부채전환 프로그램에대한 노력은 굉장했습니다. 이 거래에서
중요한점은 은행이나 남해주식회사나 점점 더 시장에서 매력적으로 '만들어져' 갔다는
것이고, 재무부는 그로써 상당한 금전적 선물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남해주식회사가 주기로했던 300만파운드는 350만 파운드로 증가, 잉글랜드은행은
입찰로 550만 파운드가 늘어난것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남해주식회사는 이
350파운드와 함께, 재무부에게 400만 파운드의 지분을 늘려주는 것으로 결국 승리를
차지 합니다. 이 추가금액은 실제로 전환 된 부채액에 의존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에다
남해주식회사는 원래 계획했던 연금부채의 상환을 7년에서 4년으로 단축하기로
약속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이자도 4%까지 내리기로 합니다. 회사가 정부부채로
주식을 만들고 이자까지 조정이 가능하다는건 아무래도 정상은 아니지만, 어쨌든
결국, 남해주식회사는 백만파운드의 재무부채권을 관리비용이나 이자없이 유통시킬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게 됩니다.
이때까지 영국은행에게는 절대 허용되지 않았던 권한이었지만, 의회는 이 제안을 쉽게
통과 시킵니다. 남해주식회사가 영국은행을 이겼다는 뉴스가 전해지자, 교환소
골목(Exchanmge Alley)의 트레이더들은 남해주식회사의 주가를 129에서 160파운드로,
무려 31포인트나 올려 입찰하기 시작합니다.
그당시 신문의 한 저널리스트는 이 상황을 "영국판 미시시피"가 추진되고 있다고
표현기도 했습니다. 부채 전환 협상이 끝나고 난 뒤 뒤이어 영국의 파운드화는 이제
막 드러나기 시작하고 있던 존로의 시스템이 그랬듯, 대기하고 있던 폭풍우가 해협을
가로질러 본격적으로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1720년 미시시피 주식은 최고점을 찍은뒤 폭락했고, 존로는 통화와 프랑스 국민들의
금융자유에 피해를 입힌 인플레이션 정책에 대한 댓가를 치루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습니다. 화폐를 지키려는 존로의 제안은 봄에 나왔지만, 이 분야에 소식이 밝은
런던의 투자자들은 존로가 자신들의 돈을 파리에서 빼내어 런던시장으로 투자하고
있다는 의심을 갖게 됩니다.
존 블런트와 그의 동료들은 미시시피 주식을 갖고 놀았던 존로의 경우처럼
지배계층에게 주식을 발행하는데 가담할 기회를 주고 그로 인해 투기에 불을 붙이게
됩니다. 지배계층들을 주식발행에 가담시킨것은 사실상 블런트 일당들의 이윤을
보장하는것과 마찬가지였기 때문입니다.
런던의 거의 모든 부르주아, 중산층들은3월 17일에 부채전환, 즉 차환을 위한 법이
시행되기에 앞서 남해주식회사의 지분을 사들였습니다. 이어서, 19일과 21일 사이,
주식은 218파운드에서 320파운드로 치솟습니다.
존로는 섭정자들에게 가혹할정도로 비판을 받으며 힘든 시기를 겪게 됩니다. 21일에는
이 법안을 두번째로 읽고 나자 앞으로 이 차환법을 고칠 것인지 아니면 이대로
법제화(statute) 할 것인지에 대해 23일 대대적인 논쟁이 벌어집니다. 이 논쟁은
주가가 270파운드와 380파운드 사이, 즉 110포인트의 범위에서 널뛰기 한다는
대조적인 뉴스가 원인이 되어 6시간만에 끝이 납니다. 그리고 남해주식회사는 주가를
400파운드까지 띄우겠다는 맹세를 합니다.
3월 25일, 잉글랜드은행은 더 많은 굴욕감을 느끼게 됩니다. 남해주식회사가 연말까지
영국은행의 총보유 채권 375만파운드를 갚아버리겠다고 발표한 것입니다. 이 부채를
갚아버린다는 말은 잉글랜든 은행이 더 이상 국영기관이 아니라는 의미였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정부의 지원, 혹은 지위를 만끽해온 은행이 하루아침에
듣도보도 못한 회사 뒤에 가려져 버린 겁니다. 더군다나 돈을 불릴 기회가 될
남해주식회사의 주식도 얼마 받지 못했습니다.
잉글랜드 은행으로써는 더 이상 굴욕적일 수 없을만큼 비참하게 만든 이 법안은
4월7일 왕실의 최종 재가를 받습니다. 남해주식회사는 이 법을 통과시켜주는 대가로
정부에게 574,500파운드라는 뇌물을 줍니다. 드디어 붐을 일으킬 만반의 준비가 끝난
것 입니다. 카스웰은 이렇게 전환된 부채로 인해, 다음해에는 무려 1,140만 파운드로
부채가 늘어났다고 합니다. 물론 이 부채는 어떤식으로든 이윤을 내서 커버해야만
했습니다. 그 당시 140파운드였던 주가는 손익분기를 맞춰야 했습니다. 그래서 4월
7일, 주가는 아무 이유없이 335파운드로 치솟습니다.
남해주식회사 주식의 사전 공모와 부채전환은 4월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는데, 이
회사의 첫번째 목적은 분명했습니다. 즉, 주가가1,000파운드까지 이를때인, 8월까지
정부부채의 두번째전환을 연기하는 동안, 새로운 주식의 가격을 올리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으로 채권자들은 막대한 차익을 얻게 됩니다. 남해 주식회사의 첫번째 공모는
4월14일에 이루어졌는데, 주당 300파운드로 총 2,250,000파운드의 주식을
발행했습니다. 그러나 주식을 신청한 사람들은 실제 구매비용이 20%가량 떨어졌는데,
2개월에 한번씩 총 16개월에 걸쳐 비용을 지불하면 되었기 때문입니다.
2주후인 4월 29일, 주당 400파운드로 총 150만 파운드 상당의 두번째 주식을
발행합니다. 이 때의 대금은 더욱 대담해져 10%까지 할인한 상태로 3,4개월의 기간을
두고 9번에 걸쳐 20개월동안 비용지불을 연기해 줍니다.
시장은 열광적으로 거래가 이루어졌고, 그와 동시에 남해주식회사는 6월 17일, 주당
1,000파운드에 총 500만 파운드라는 대규모의 세번째 주식을 발행합니다. 다시한번
10%의 할인, 그러나 비용지불은 무려 54개월로 연장, 6개월에 한번만 분할 납부하도록
합니다.
8월 24일, 네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주식을 발행하는데, 주당 1,000파운드로 총125만주,
합계 12억5천만 파운드를 시장에 내 놓습니다. 이 주식은 20%를 할인, 그 다음
36개월동안에 걸쳐 납입하도록 합니다. 이렇게 해서 남해주식회사는(7천5백 25만
파운드), 무려 총 40억파운드가 넘는 돈을4년반에 걸쳐 받게 되었습니다.
시장에서 남해주식회사의 주식을 거래하는 방법은 두가지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실제
주식, 또하나는 주식공모에 신청한 영수증이었습니다.
이 주식에대한 수요는 대단했습니다. 주가가 상승한것도 그렇고 네번에 걸쳐 발행한
주식이 얼마나 빠르게 팔려나갔는지를 보면 더욱 놀라운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제일
처음에는 한 시간만에, 두번째와 세번째는 몇시간, 마지막 네번째는 주식을 발행한지
불과 세시간만에 팔려 나갔으니까요. 추가 발행끼지도 얘기가 나왔지만, 그러나
시장이 붕괴되기 시작할 무렵인 9월초가 되자 서둘러 그 다음 단계를 진행시키게
됩니다.
그것은 딕슨이 설계한 모티브를 따르는것으로 정부 부채를 전환하기보다는 출자금을
모으거나 주식을 발행하는것으로 블런트와 이사회는 결정을 내립니다.
“…처음에는, 어떤 제한도 없이 그들의 자본을 법적으로 늘릴 수 있다는 인식하에,
정부의 채권자들에게 빚을 갚기 위한 일환으로 주식을 발행하는것이었고, 두번째는,
이러한 권한이 즉각적으로 받아들여지므로써 시장을 교란시키기 보다는 단계적으로
교환이 이루어지길 원한 것이며,. 세번째 동기는 물론, 그들의 자금이 원하는만큼
충족된다면, 기다려 볼것도 없이 정부가 가능한 빨리 점검하여 현금화 되기를
바란것이다…”
남해주식회사가 자신들의 주식으로 연금을 전환하기 시작했을 때, 연금의 보유자들은
신주권을 받고 시장에 붐이 일면 팔기를 원했지만, 남해주식회사는 시장에 쏟아부은
주식에 그다지 열중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주가 상승에 찬물을 끼얹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연금을 받는 사람들의 일부와 그들의 변호사들은 정부로부터 받은 장부에 이름과 연금
액을 기입하고 문서에 제목을 적은 다음, 남해주식회사의 건물 앞으로 나와 시위를
합니다…이들이 가지고 온 서류는 그들 대부분의 처지를 개괄적으로 포함한
것이었지만, 불행히도 회사에서는 이들이 내민 서류를 거부합니다. 3명의
남해주식회사 직원들에게 건네진 서문의 내용(연금에 맞는 주식을 달라는)과는 달리
주식은 1720년 12월 30일이 될때까지도 건네지지 않았습니다. 이 방법은 그 다음해
7월에도 반복되었고, 세번째에도 계속되었다가 8월달 마지막 부채 전환이 이루어지고
나서야 이들이 서류를 읽지 않았다는 것이 알려지게 됩니다. 따라서 정부 채권자들은
자신들의 부채를 전환한 남해 주식회사의 주식을 가질 수 있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어 버리고 맙니다....
f. 남해주식회사의 파산
네번의 신주발행후 주가가 떨어지기 시작하자 블런트와 이사회는 기존의 방식이외의
출자금을 모으는 방식을 취하기로 결정합니다. 이에 대한 영국의 경제혁명을 쓴
딕슨의 설명입니다.
“…처음에는, 어떤 제한도 없이 그들의 자본을 법적으로 늘릴 수 있다는 인식하에,
정부의 채권자들에게 빚을 갚기 위한 일환으로 주식을 발행했었고, 두번째는, 이러한
권한이 즉각적으로 받아들여지므로써 시장을 교란시키기 보다는 단계적으로 교환이
이루어지길 원했으며,. 세번째 동기는 물론, 그들의 자금이 원하는만큼 충족된다면,
기다려 볼것도 없이 정부가 가능한 빨리 점검하여 현금화 시키기를 바란것이다…”
남해주식회사가 자신들의 주식으로 연금을 전환하기 시작했을 때, 연금의 보유자들은
신주권을 받고 시장에 붐이 일면 팔기를 원했지만, 남해주식회사는 시장에 쏟아부은
주식에 그다지 열중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주가 상승에 찬물을 끼얹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연금을 받는 사람들이나 그들의 변호사들은 그들이 받은 장부에 이름과 연금액을
기입하고 문서에 제목을 적은 다음, 남해주식회사의 건물로 나와 보여 주었습니다.
시위를 한 거죠…그러나 이들이 가지고 온 서류는 그들 대부분의 비참한 처지를
개괄적으로 표현한 것이었지만, 불행히도 남해회사에서는 읽기를 거부합니다.
3명의 남해주식회사 직원들에게 건네진 서문의 내용(연금에 맞는 주식을 달라는)과는
달리, 주식은 1720년 12월 30일, 주가가 폭락할 때 까지도 건네지지 않았습니다. 이
방법은 그 다음해 7월에도 반복되었고, 세번째에도 계속되었다가 8월달 마지막 부채
전환이 이루어지고 나서야 이 문서가 건네지지 않았다는 서실이 알려지게 됩니다.
따라서 정부 채권자들은 자신들의 부채를 전환한 남해 주식회사의 주식을 가질 수
있게 될 것이라는 기대, 자신들의 연금을 조금이라도 건질 수 있을것이라는 기대를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어 버리고 맙니다.
정부 부채에 대한 1순위 채권자들이 모두 순박한 대중들이 아니었지만, 그러나
잉글랜드 은행이나, 밀리언 뱅크, 또는 다수의 부자들이나 힘이 있는 개인들보다 그
권한이 적은것은 아니었습니다. 딕슨은 그런 그들이 어떻게 집단적으로 속아 넘어갈
수 있었는지를 설명합니다.
“…장/단기 연금의 80%(무상환공채)와 정부의 일반채권 85%(상환공채)는
남해주식회사의 주식으로 전환되었다. 남해주식회사의 명목상 자본은 2,600만 파운드
이상으로 늘어났으며, 1727년 여름 중반까지 어떤 것은 5%, 또 어떤 것은 4%이자를
지급하도록 했고, 그 다음 전체를 4%로 통일했다. 1720~1년 겨울, 실망한 일반
채권자들 중 일부가 가혹한 압박을 행사했음에도, 이 전환은 폐지 되지 않았다…
…이 두 가지가 같이 하나의 계정으로 합쳐졌을 때, 남해 주식회사는 단기연금 2600만
파운드의 소유자들과 3100만 파운드의 정부 채권을 가지고 있는 소유자들을 설득할 수
있을 정도로 주가가 오른 것 을 발견했다. 그러나 지나치게 고 평가된 남해주식회사의
주식이 폭락하자, 그로 인해 그들이 부채 교환을 신청할 수 있었던 금액은 고작 850만
파운드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1720년 봄이 끝나고 여름이 시작될 무렵, 파리에서도 그랬듯, 외국인 투자자들이
주식을 매입하면서 주가를 최고치로 밀어 올리기 시작합니다. 홀란드에서도 역시
정화가 유출, 런던에 도착한 그 돈들은 남해주식회사의 주식을 구매하는데
사용됩니다. 동시에, 남해주식회사는 런던환전골목(Exchange Alley)의 상인들에게
남해주식회사의 주식을 담보로 대출을 해주도록 직접적인 압력을 행사하여 유동성을
공급합니다.
이 조치로 일어난 대출이 무려 1100만 파운드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잉글랜드 은행
역시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주식을 담보로 스스로 대출을 하는 바람에 버블이라는 불
속에다 기름을 던진 꼴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정부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나중에 남해주식회사의 주식을 사는데 사용하려는
목적으로 남해주식회사에게 100만 파운드의 재무부 증권을 빌려주는 법안을 통과 시켜
버렸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노예무역을 위해 설립된 영국 왕립아프리카회사(Royal
African Bank)조차도 102,000파운드를 들고와 이 파티에 합류합니다. 바야흐로 광기
어린 투기의 댐이 그 양을 견디지 못해 금이 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남해주식회사의 주가는 고공 행진을 계속했습니다. 6월에 600파운드로 시작했던 것이
6월말이 되자 거의 1,000파운드까지 치솟습니다. 상황이 이처럼 어마어마하게 번지자
런던 환전소 골목에는 너도나도 새로운 기업을 만들려는 열풍마저 불어 닥칩니다.
그러나 이때 만들어진 회사는 거의 대부분이 사기를 목적으로 한 것이었는데, 특정
주가의 계약금을 낮추는 데다 거치식으로 지불하는 방법으로 사람들을 유인한 후,
계약금만 받고 사라져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대중의 버블심리를 노리는 회사의 수가 그해 6월 정점에 달합니다. 한 달 동안
무려 88개의 유령회사들이 만들어 진 것입니다. 그러나 1720년이 끝날 때 까지
남아있는 회사는 11개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투기는 남해주식회사나 비슷한 류의
버블컴패니를 가리지 않고 이루어졌습니다. 딕슨의 저서 “영국의 금융 혁명The
Financial Revolution”에서도 언급되어 있듯, 다른 주가가 오른 만큼 이 때의 토지
값도 거의 두배가 상승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 속에서, 아이러니컬하게도 6월 달 투기가 최고점에 달한 것은,
결과적으로 영국정부 스스로가 버블을 터트린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6월 11일 왕의
동의하에 시행된, 이른바 “거품규제법Bubble Act”으로 인해 의회의 명시적인 승인이
없는 주식회사의 신규설립이 금지됐는데, 이 조치로 인해 두 달 뒤인 8월, 4개의
회사가 이 법을 위반한 것이 발각되어 고소했지만, 이 일로인해 오히려 역풍을 맞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킨들버거는 이 규제를 “남해회사의 투기를 억제하기 위한 대응으로 해석하는
것이 이전까지의 통상적인 견해지만, 카스웰은 남해회사의 거품이 팽창하면서 그
발기인들이 강렬히 필요로 하던 현금을 빼앗아 갈 수 있는 경쟁회사의 설립을 왕과
의회가 억누르기 위해 취한 남해회사의 후원 조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고 그의 책
금융위기의 역사에서도 동일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즉 위의 4개의 회사, 영국구리회사(English Copper Company), Royal Lustering
Company, 요크빌딩(York Buildings Company), 웨일즈구리주식회사(Welsh Copper
Company)에 대한 고소는 이들의 면허가 만료되므로써 기간을 연장하려는 행위를
불법으로 사전에 규정해 놓은 것이었는데, 남해회사 외의 다른 회사의 주가는 왕이나
의회에게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 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네 회사들에 대한 영장 발부가 오히려 남해주식회사의 주가를 추락시키는
트리거가 되고 맙니다. 존로처럼 크리스마스 배당금을 30%까지 주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하며 주식의 수요를 늘리려는 필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환전골목의
매도러쉬가 갑작스레 쏟아져 들어온 것입니다. 6월 1,000파운드까지 치솟던
남해주식회사의 주가는 9월 중순 520파운드로, 10월에는 200파운드, 그리고 12월에는
120파운드까지 떨어지며 붕괴의 길을 걷기 시작, 그리고 버블은 드디어 보란듯이
터지고 맙니다.
남해주식회사가 각지고 있던 유일한 자산은 무역상의 특권을 제외하고는 년간
재무부로부터 들어오는 이자수입을 포함한 200만 파운드 가량 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나마도 실제 들어 온 것은 145만 파운드가 전부였습니다. 남해주식회사의
지불능력은 이미 상실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사실상 기술적으로 파산상태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남해주식회사는 로버트 월폴Sir
Robert Walpole의 대대적인 조직개편을 통해 몇 년 동안이나마 기업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남해주식회사가 애초에 공기업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습니다.
20년간 최초의 내각 책임제 총리로 사랑과 존경을 받았던 월폴은 이 난파직전의
금융위기에서 누구를 건져 낼 것인가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의 선택은 정부가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한편…돌이켜 보면 차라리
채권자들에게 부채를 일부, 그러니까 40%라도 청산하자는 솔직한 딜을 했었더라면
이런 무모한 버블이 일어나지 않고서도 모두가 살아남을 수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영국정부를 포함한 기득권의 부채 떠넘기기와 그것도 모자라 금융상의 이익을
취하는 것 까지 바란 인간의 이기와 욕심은 사회적 도박심리를 극대화했고, 오히려
그로 인해 기업과 국민은 죽이는 대신 정부는 살아남는 희한한 전례를 남기고
말았습니다.
물론 이 중에는 진정으로 도전정신을 가진 훌륭한 벤처기업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막대한 전쟁비용과 재정적자를 메우는데 필요한 돈을 만들기 위한 방법으로
국영기업을 민영화하고 이를 이용해 다양한 조작을 하는 존로식 시스템하에서는
그들이 아무리 발버둥쳐도… 그때나 지금이나 어쩔도리가 없다는 것은, 역사를 재
조명하는 지금도 여전히 슬픈 일 입니다…
………………….
정직한 노동과 생산으로 부를 일구어 왔던 이때까지의 사회적 통념은 온갖 불법을
이용, 누군가의 비용을 대가로 일부 집단에게 쏠리는 현상을 보편화 시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미친듯한 투기적 환경은 정치적 부패, 엄청난 부의 편중과 사기,
그리고 폭력을 불러왔음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비참했던 당시의 상황을 묘사한
안드레아즈의 글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 들이 남해주식회사의 위기가 영국에게 이익이었다는 추론으로
우리를 안내하는 것은 아니다. 그 상황은 엄청난 동요와 불공정한 부의 재분배를
가져왔으며, 황폐화된 하노버왕가의 군주체제와 거의 다름없는 결과를
가져왔다….이러한 상황을 잘 알고 있던 주식의 보유자들은 단지 주가를 조작했을 뿐
아니라 거기에다 이익을 얻으려고 까지 했었다….이 투기꾼들은 ?이것은 위기의 가장
고통스런 형태중 하나인-사회의 모든 계급을 대표했으며, 초기에는 백만장자였던
이들을 가장 가난한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이 방탕한 역사적 에피소드의 가장 큰 수혜자는 말할 것 도 없이 영국정부였습니다.
영국정부는 자신들의 무절제한 방종과 전쟁으로 발생된 절대 극복할 수 없을 것으로
보였던 산더미 같은 부채를, 민간은행과 남해주식회사 그리고 채권자들에게 더 많은
비용을 부담 시키는, 몇 가지 유용한 법을 만드는 방법을 이용, 간단히 벗어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정부가 지고 있던 원리금 상환에 대한 의무는 거부한
대신 그 고통은 정부를 의심하지 않았던 대다수의 국민들이 떠안게 된 것입니다.
남해주식회사의 버블은 미시시피 버블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안에 막을
내렸습니다. 이 두개의 버블간의 다른 점이라면, 존로의 경우 로얄뱅크를 이용해
통화량을 증가시키는 방법을 사용했기 때문에 비교적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의 시스템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것이고, 반면 영국은행은 남해주식회사가 정부 부채를 차환하는
과정에서 시작부터 소외 되었다는 사실 입니다.
따라서 버블이 터졌을 때 영국은행은 오히려 살아남을 수 있었는데, 이는
동인도회사의 주식 할인 중단과 대출 회수, 그리고 현금 보유를 늘리기 위해
장기성이자부지급어음을 파는 방식으로 위기를 극복해 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고 하지만, 만약 잉글랜드 은행이 정부부채를 차환할 수 있는
권리를 두고 남해주식회사와의 입찰에서 이겼다면, 미시시피 버블은 반복 되었을
것이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 입니다. 물론 그로 인해 영국인들이 겪어야
했을 금융상의 고통은 훨씬 더 컸을 테구요…
…………
작업을 하면서도 유난히 힘들었던 남해주식회사에 대한 글을 이렇게 마무리 짓습니다.
지금까지 두 가지 버블의 역사를 나름 구체적으로 정리해 보고 원인을 밝혀 내려는
다각적인 시각을 살펴 보았지만, 그렇다해도 연준으로 대변되는 현재의
메인스트림에서 바라보는 대응방식과는 아무래도 차이가 있을 수 밖에는 없습니다.
특히나 합리적 기대 이론 학파들의 주장처럼 모든 시장 참가자들은 모두 합리적으로
행동하며 따라서 미래를 예측할 수 있기 때문에 버블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시각이
정형화되어 있는 탓에 이에 대한 비판적 시각은 흔히 음모론이나 탁상공론식으로
비하되기 일쑤였지요.
그래서 이 글에서 보여주고자 한 것은 투기적 버블이 어떻게 발생하였고, 시장
참가자들은 미래를 예측할 수 없었다는 것, 그리고 그 행동들이 절대 합리적이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연재의 맨 처음도 “더 바보이론”을
설명하면서 그에 관한 견해를 언급한 것이기도 했구요…
결국 이러한 예측이 힘들기 때문에 존 테일러와의 인터뷰라는 글에서 굿하트의 법칙을
부연적으로 설명하기도 했듯이, 경제학자들은 인간의 행동에 대한 좀 더 근본적인
연구를 시도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것이 부적절하다는
것이 아니라, 합리적 기대 이론학파의 결론이 현재의 투기적 버블을 명료하게
설명해주지 못하고 있다는 일종의 자기 반성에서 나온 것이라는 의미를 내포할
따름입니다.
이제, 다음 글 부터는 통화량의 증가가 투기버블과 어떤 연관성을 갖고 있는지를 좀
더 자세히 적도록 하겠습니다. 물론...가능하면 길지 않게 쓰는 것이 좋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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